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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에세이] 방송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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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에세이] 방송이 뭐길래

입력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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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병원인데요, 둘째가 나오려나봐요』 밤새 원고를 쓰고 잠든 남편을 깨우기가 안쓰러워 혼자 병원에 간 아내의 전화였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혼자 병원에 갔을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새벽 5시30분,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또 전화벨이 울렸다. 『형! 나 교통사고 났어』 개그맨 백재현이었다. 머리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든 것도 잠시. 기가 막히게도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야! 그럼 오늘 개그콘서트 녹화는 어떡해?』

잔인했다. 방송이 뭐길래 내 자신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단 말인가? 한 손으로는 진통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잡은 채 대책마련을 위해 PD와 후배 작가들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오전 9시 45분, 드디어 둘째가 태어났다.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백재현이 실려간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은 커녕 응급실에도 자리가 없어 복도 한 켠에 누워 있는 재현이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절대안정을 요구하는 담당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재현이를 데리고 녹화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분장실 한 쪽에 소품용 침대를 놓고 재현이를 눕혔다. 핏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분장을 하고 있는 재현이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외쳤다.

오후 7시, 「개그콘서트」를 보기 위해 차가운 비를 맞으며 몇시간씩 서 있었던 관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없어 계단에 앉고 객석 뒤에 서고 무대 한 쪽까지 차지하고 있는 관객들을 보니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오후 8시, 녹화가 시작됐다.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져 갔다. 무대 위에서 재현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오후 10시 앵콜을 끝으로 녹화가 끝났다. 관객들이 떠나고 세트가 치워지고 조명이 꺼졌다. 재현이와 나는 각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쓸쓸히 내리는 겨울비와 함께 기나긴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손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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