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맞은 지 2년. 곳곳에서 『옛날처럼』이라고 외치지만 정작 중산층 서민들의 반응은 냉소적이기만 하다. 『창업후 장사가 안돼 은행빚으로 생활하는 데 뭐가 나아졌다는 것인가』(영세 자영업자 K씨) 『직장을 잃고 재기불능의 빈곤층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30대 실직자 K씨) 『계층에 따라 겨울(IMF한파)의 길이도 다르다』(시민단체 관계자).이들의 울분 섞인 목소리는 우리사회 허리층의 심각한 디스크 증상을 반영한다. 상·중·하 삼분법은 이미 무너졌고, 20%의 상류층과 80%의 서민 또는 빈곤층이 있을 뿐이다. 절대 빈곤층이 1,000만명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왔다. 10년간 가구사업을 해온 장모(48)씨는 IMF이후 2년을 버텨 왔지만 장사가 안돼 10월중순 눈물을 머금고 폐업했다. 장씨는 『집팔아 빚갚고 나니 전세금도 안남았다. 먹고 살기 위해 얼마전 택시운전을 시작했지만 재기가 힘들다』며 좌절감을 토로했다.
영등포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전진천(42)씨에게 IMF는 이제 시작이다. 지난해만 해도 하루 최소 10마리는 팔았지만 최근엔 저녁때까지 개시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벽부터 밤12시까지 일하지만 점포세도 안 나옵니다. 대형·고급 음식점은 휘파람을 불어도 영세상인은 죽을 지경이에요』
농촌도 IMF기간 동안 늘어난 부채 때문에 몰락위기에 몰려 있다. 경북 김천에 사는 농부 C(50)씨는 『농작물 시세도 예전같지 않고 빚만 3,000만원이 늘어나 이자 갚기도 버겁다』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 한국소비자보호원 조사에 따르면 살림살이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사람이 전체의 34%로 지난해 2월(22%)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10명중 4명은 실직 불안감을 호소했고 중산층의 총소득은 상위층 소득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YMCA 시민중계실 서영경(徐瑩鏡)간사는 『실업 및 고용 불안정으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0%에서 30%로 급감했다』며 『살기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상류층 20%에 국한되고 나머지 80%의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이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노동자 절반이 '임시·일용직'
IMF체제는 지난 50년간 우리 경제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중산층의 몰락과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재앙」을 몰고왔다. 시중에 돈이 넘치고 백화점의 고가제품 매출이 급증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서민층에겐 다른나라의 이야기다.
통계청의 고용동향자료에 따르면 임시·일용직 노동자의 비율이 99년 3월 이후 50%를 넘어 저임금·불완전 고용형태가 고착화하고 있다. 도시가계연보는 99년 상위 20%의 총소득이 3.7% 증가한 반면 하위 20%는 총소득이 8.4% 감소해 「20대 80의 양극화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하위 20%의 소득이 상위 20% 계층 소득의 99년 17.45%로 96년 30.5%에 비해 2배 가까이 악화됐다.
노숙자도 다시 불어나 서울 영등포구 노숙자 쉼터 「자유의 집」 입소자는 11월말 900명을 넘어서 올 1월 1,300여명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인근 시장 잔심부름꾼, 공사장 잡부로 나서보지만 날씨 관계 등으로 일할 수 있는 날이 한달에 20일에도 못미쳐 손에 쥐는 돈은 80만원선에 불과하다.
더구나 최근엔 처음 노숙의 길로 들어선 신규입소자가 부쩍 늘어나 전체의 40%에 이른다. 자유의 집 최성남(崔成男·37)사무국장은 『노숙자들이 재기해보려 해도 그동안 진 빚으로 이미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혔기 때문에 재취업도 어려워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홀로 사는 노인등 절대빈곤층들은 그나마 자선단체의 구호의 손길마저 끊겨 지난해보다 힘든 겨울이 예상된다. 서울 강서구 방화2동 재개발지구에 혼자 살고 있는 민모(77)씨는 생활보호지원금 15만원 내외가 유일한 생계수단. 간간이 지급되던 교회 등 자선단체의 성금도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고 월세 10만원에 사는 단칸방도 재개발로 인해 12월까지 비워줘야 할 처지다. 민씨는 『얼마 남지않은 생, 아무 집착도 없다』고 말했다.
한때 스스로 중산층임을 자부하면서 슈퍼마켓을 운영해온 강모(48)씨는 『도대체 경제가 나아졌다는 이야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IMF체제를 극복하자며 전국민이 금도 모으고 허리띠도 졸라매고 할 때는 「나도 참고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지만 요즘엔 그런 분위기도 아니고 내년이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없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철근공 이상기씨의 2년 '부도-빚더미…`
이상기(가명·40)씨는 서울 영등포구 노숙자 수용소 「자유의 집」 단골출입자이다. 24평 전세아파트에 한달 200여만원 수입, 아내와 초등학생 딸…. 그러나 IMF체제는 이씨의 작은 꿈과 희망을 철저히 앗아갔다.
공사장 철근시공사업을 하던 그는 98년 7월 하청을 주던 건설업체의 파산으로 연쇄부도를 맞고 집에 들어앉게 됐다. 이씨는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챙겨줘 3,000만원 빚까지 떠안게 됐고 생계는 부인(37)이 책임졌다.
자포자기한 이씨는 식당일이 바빠 늦게 들어오곤 하는 부인을 의심해 폭행을 일삼아 폭력혐의로 2개월간 구치소 생활을 했다. 지난해 11월 출소해 보니 부인은 월세방을 처분해 딸을 데리고 떠난 뒤였다. 이씨는 결국 자유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첫 좌절을 딛고 막노동으로 모은 300만원을 밑천으로 지난 4월 자유의 집을 떠난 이씨는 건축공사장 철근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씨는 공사현장에서 인부 몇명을 거느리고 철근작업을 총괄하던 중 자재비 상승과 철근공급업체의 어음결제로 현금이 돌지 않아 다시 부도를 맞고 하는 수없이 11월 자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씨는 『가정이 무너지고 2년도 안돼 2번이나 쓰러져 보니 희망을 말할 힘도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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