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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에 우리가 사네](3) 노령산맥 속의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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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에 우리가 사네](3) 노령산맥 속의 IMF

입력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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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옥정호 동쪽 마을로, 노령산맥의 북쪽 언저리다. 댐에 물이 차 오르자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거나 더 깊은 산 속으로 옮겨서 산다. 자전거는 이 산간마을에서 출발한다. 옥정호를 동쪽으로 우회하면 임실군 덕치면에서 섬진강 상류의 물줄기와 만난다. 거기서부터 섬진강은 노령산맥의 구비들을 이리저리 휘돌아서 파행남류한다. 자전거는 이 섬진강 물가의 우마차로를 따라 파행남류해서 순창까지 갈 판이다.자전거는 출발지 산간 마을에서 이틀을 눌러 붙어 있었다. 낮에는 산길을 천천히 저어 다니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의 집들을 찾아서 마실을 다녔고, 저녁에는 학교가 파해서 돌아온 마을 아이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아이들이 낯을 가리지 않았지만, 취재용 산악 자전거를 너무나도 부러워해서 늙은 기자는 무참했다.

삶이 다 망가진 사람들은 산골 마을의 고향을 떠났고, 아주 할 수 없이 더 망가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산속 여우치마을이 고향인 김병운(40)씨는 2년전 IMF 초기에 다 거덜난 삶의 보따리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 김씨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목공예를 배웠다. 16살 때부터는 남원에 있는 목기공장의 직공으로 들어가서 장인 수업을 받았다. 30살이 될 때까지 직공 월급을 모아서 6,000만원을 장만했다. 그는 그 자금으로 남의

땅을 빌리고 기계를 사들여서 남원 갈치마을에 자신의 목기공장을 차리고 작은 사장이 되었다. 직공 8명을 데리고 주로 소반을 만들었다. 수작업으로 품이 많이 들어가는 그의 물건은 대도시의 백화점에까지 진출했다. 그의 작은 공장은 탄탄했다. 95년말 까지만 해도 매월 2,5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IMF 위기가 닥쳐오자 판매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부도나기 시작했다.

자금을 굴릴 수가 없었고, 중간 상인들이 잠적해 버려 물건값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의 공장은 3억의 부도를 안고 쓰러졌다. 남원 일대의 작은 공장들이 대부분 그 모양이었다. 갈 곳은 고향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빈털털이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24년만의 귀향이었다. 고향에는 심장병 수술을 받은 늙은 아버지가 농사 일을 힘에 부쳐 했다. 늙은 아버지의 땅은 가파른 산비탈이었다. 남원에서 공장을 정리할 때 직공들의 밀린 임금을 갚아 주느라고 은행돈 3,000만원을 빌려 썼다. 이 돈의 이자를 제 때에 갚지 못해서 그는 신용 불량자로 컴퓨터에 입력되었다. 신용 불량자에게는 귀농자 정착지원금이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그의 모든 삶은 연체에 연체가 자꾸 쌓여가는 은행 이자와의 싸움이다. 그의 싸움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처럼 보였다. 『은행처럼 무서운 건 없다』고 그는 말했다. 매달 이자 갚을 돈이 현금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농사일을 할 수도 없다.

그는 마을 경찰 파출소에 나가서 공공 근로 방범요원으로 일한다.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이 산속 마을을 방범 순찰하고 소내근무도 한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 새벽에 2만2,000원을 준다. 한 달에 20일씩 날밤을 새우는데, 3개월에 한번씩은 재채용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만 가지고는 이자와 생활비가 해결되지 않는다. 집에서 파출소까지는 산길을 걸어서 1시간이다. 새벽 5시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침 8시까지 잠자고 다시 일어나서 공사장에 나간다.

요즘 나가는 공사장은 김제평야의 농로 보수 공사장이다. 집에서 김제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 걸린다. 그는 토목 분야에서는 아무런 전문 기술이 없다. 공사장에서는 등짐으로 자재를 운반하거나 삽질 같은 막일을 한다. 하루 9시간 등짐을 지고나면 4만5,000원을 준다.

일거리가 매일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10일 정도만 있다. 공사장에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저녁밥 먹고 또 밤새우러 파출소에 간다. 그가 등짐지고 날 밤새워서 얻는 이 가랑잎 같은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은 밥으로 바뀌어져서 가족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몽땅 이자로 은행에 들어간다. 이것이 금융 거래의 기본 질서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는 한 그가 원금을 갚을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남은 여생 내내 허구한 날 등짐 지고

날 밤 새워서 다 은행에 가져다주어야 할 판이다. 그가 돌아온 고향은 아직은 그의 고향이 아닌 듯 싶었다. 금년 초에 이 마을 앞 옥정호수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고 내수면 어로 행위가 금지되었다. 민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고 가두리 양식장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소망은 『고향에 남아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호수의 상수원 단속반원으로 취직해서 등짐 지기와 날 밤새기를 면해보려하는데, 경쟁이 치열해서 될는지 알 수 없다. 그가 다시 고향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마을 최정운(41)씨도 빈 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최씨는 인천에서 대형 화물 트럭 운전기사로 일했다. IMF 초기에 물동량이 줄어서 일거리가 없더니 결국은 회사가 부도로 쓰러졌고 최씨는 해직되었다. 농협에서 돈을 꾸고 또 사채도 좀 얻어서 이 산 깊은 고향 마을에서 표고 농장을 해 볼 작정이다. 그러나 아무런 경험이 없어서 불안하고 또 내년의 수확기까지 버티어 낼 자금이 될는지, 남의 돈으로 시작하는 사업에서 이자를 제하면 무엇이 남을는지 걱정이다. 그 걱정을 끌어안고 그는 지금 농장터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산 속을 뒤지고 다닌다.

IMF 이후에, 도시에서 망가져버린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이 산골마을 기웃거리다가 그냥 돌아갔다. 아이들의 전학수속까지 마쳐 놓고나서, 부인들의 반대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이 고장 사람들도 있고 외지 사람들도 있었다. 시퍼런 물과 가파른 산뿐인 이 마을에 그들은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도 어느 낯선 산천을 기웃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김병운씨와 최정운씨는 전적으로 무죄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책임져야 할 일을 저질렀기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고향은 아직은 그리던 고향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고단한 고향에서, 돌아온 고향 사람들이 새로운 고향의 희망을 길러 낼 수 있을까. 고향에서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던 고향이 아닌 고향도 결국은 그리던 고향일 터이다. 자전거는 눈부신 섬진강 길을 미루어 놓고 이틀 동안 이 마을에 머물렀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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