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나타나서 인류의 생활과 문화를 광범위하게 바꾼 단어 중의 하나. 「하이테크(Hi-tech)」다. 그것은 20세기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벤처기업은 이를 통해 노다지를 일구고 있다.그런데 하이테크의 안락함이 복에 겨웠던 것일까. 하이테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첨단의 발상을 거부하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름하여 「로테크(Lo-Tech)」. 쉽게 풀어 얘기하자면 몸으로 때워 일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는 시간당 단위 생산량이 매우 적은 저생산성의 일들이다. 1인 가내 수공업의 형태가 특징인데 산업계는 물론 문화계에서도 그 움직임이 퍼져가고 있다.
■ 미술에서의 로테크
얼마전 전시를 가져 화단의 이목을 받은 함진(21·경원대 환경조각과 4년)씨. 젊은 작가들의 대안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는 프로젝트 갤러리 「사루비아 다방」이 선발한 작가. 그는 아이의 장난감처럼 작은 인형과 미니어처를 만들어낸다. 부러진 칫솔, 그림 조각, 찰흙 등 일상의 재료로 놀이를 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화가 이진경씨는 핀이나 브로우치를 만들어 파는데, 요즘 유행하는 키치 패션, 즉 핀에 원색의 털실로 뜬 꽃이나 눈송이 같은 것들을 치장한다. 작품이라고 하지만 하나에 1,000-2,000원 하는 가격으로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헐값이다. 설치작가 신형섭씨는 우산살이나 전구를 조합해 메뚜기를 만들고, 지난해 금호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던 이범준씨는 고물상에서 수집한 낡은 주전자나 쇠붙이를 이용해 거미를 만들어낸다. 경원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박종엽씨는 세필로 동그라미만을 그리는 독특한 작가다. 페인트공 경력 7년의 노련한 기술자인 그는 낮에는 페인트 칠로 생계를 꾸리고 밤에는 동그라미를 그리는 단순한 작업을 한다.
이 작가들의 작품의 특징은 한결같이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작으며, 「세련된 미술」 「전시장을 치장하는 미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90년대 중반까지 경제 호황을 타고 거대한 전기기계 장비가 들어가는 대형 설치작품이 주류를 이뤘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 대형전시장과 컬렉터를 위해 작품을 만들다 보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작품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게 이런 부류의 작가들이 하는 말이다.
■ 로테크의 전사, 인디밴드들
대자본이 강요하는 순치(順致)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은 대중음악계에서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포착된다. 인디 밴드인 「삼청교육대」 「껌」 「삼천 펑크」 「푸른 펑크 벌레」 「볼빨간 리믹스」 등의 음반은 기존의 음반에 비해 음질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녹음실의 잡음이 들어가 있기도 하고, 사운드 믹싱이 엉성하거나 거칠기도 하다.
이른바 「로파이(Lo-Fidelity·저감도)」. 흔히 성능 좋은 오디오를 말하는 「하이파이(Hi-Fidelity·고감도) 」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좋은 장비들을 갖춘 스튜디오를 임대해서 사용할 경우 녹음실 비용만 수백만원이 들 수 있다. 또 사운드 엔지니어가 개입하다 보면 원하는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없고, 더 큰 이유는 이렇게 고비용을 투자하다 보면 원하는 파격적 스타일의 노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게다가 일부러 만들어내는 저감도의 음질은 그 나름으로 새로운 소리의 미학을 만들어 낸다.
음악전문케이블인 m.net가 올해 처음으로 11월 27일 시상한 「99m.net 영상음악대상」 15개 부문에는 인디 부문 뮤직비디오까지 대상에 올랐다. 본선에 오른 「닥터 코어 911」 「황신혜밴드」 등 대부분은 홈비디오로 찍은 것들. 대상을 수상한 인디밴드 「노 브레인」의 「청춘 98」 역시 홈비디오로 클럽과 거리에서의 자유로운 모습을 찍은 것이다. 흔들리는 불안정한 화면은 인디밴드의 자유로움을 그대로 대변한다.
■ 로커 신해철의 실험
그러나 로파이의 자유로운 정신은 「돈없고 빽없는」 인디밴드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런던에서 2년간 거주하다 6개월 전 다시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로커 신해철. 그의 작은 아파트의 거실에 꾸민 홈 스튜디오 장비라고는 500만원 짜리 콘솔과 맥킨토시 컴퓨터가 전부다. 싱어송 라이터를 넘어 이제 그는 엔지니어까지 겸하고 있다.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나는 사운드다. 엔지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와는 다르다. 문제는 좋은 기계가 아니다. 이 정도의 기계만 있다면 사운드에는 문제가 없다. 홈 스튜디오에서 로파이 시스템으로 하이파이 사운드에 도전하는 것은 이미 구미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작업은 인디들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집에서 녹음을 하기 때문에 윗층에서 물내리는 소리, 외부에서 주차하는 소리 등이 녹음에 들어간다. 대신 그는 이 사운드를 일일이 잡아낸다. 사운드는 하이파이, 방식은 로파이 방식이다. 그는 『이제 아마추어와 프로가 구분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신해철은 발달한 기계 문명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첨단형 로테크형 아티스트」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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