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야말로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바둑」을 둘 수 있는 나이입니다』올가을 제4기 LG정유배(구 테크론배)를 쟁취, 7년 무관(無冠)에서 탈출한 「야생마」 서봉수(46)9단은 이런 우회적인 말로 우승소감을 대신했었다.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바둑, 「바람에 넘어져도 꺾이지 않는 잡초 바둑」의 원리를 터득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약관 20대에 천하통일을 이룩했던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성숙한 기량으로 반상정복에 나서게 될 지 자못 기대되는 말이기도 하다.
신예강호들의 기세에 밀려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싶었던 「고개숙인 40대」들이 반란을 시작했다. 대표주자는 올해 마흔여섯살 동갑내기인 서봉수9단과 조훈현9단. 한국 바둑사의 산증인이자 양대산맥이라고 할만한 두 「노장기사」는 요즘 젊은 시절 못지 않은 실력과 뚝심으로 다시 한번 기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 사전에 세대교체란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과시라도 하듯 그 기세가 가히 파죽지세다.
올6월 중국 춘란배 결승3번기에서 제자인 이창호9단을 2승1패로 따돌리고 우승했던 조훈현은 올들어 현재까지 종합전적 44승 12패를 기록, 80%에 육박하는 승률을 보이고 있다. 9월 14일 제18기 KBS 바둑왕전 본선에서 유창혁9단에 흑불계승을 거둔 뒤부터는 13연승의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으며, 최대의 난적 이창호와도 모두 6번 싸워 4승 2패의 단연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일인천하를 구가하던 이창호의 아성도 조9단의 분전으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 지난해말까지만해도 국내기전 10개중 8개 타이틀을 보유했던 이9단은 조9단에게 국수전과 KBS바둑왕전 타이틀을 잇따라 빼앗겨 5관왕으로 추락했다. 이로써 국내 기계 영토분할은 이창호 5(명인·왕위·기성·천원·최고위), 조훈현 3(국수·패왕·KBS바둑왕), 유창혁 1(배달왕), 서봉수 1(LG정유배)로 재편된 상태.
이달초 속기전인 제18기 KBS바둑왕전에서 2대0 완봉승을 거두고 이9단의 타이틀을 뺏어온 조9단은 11일부터 벌어진 ⓝ016배 제7기 배달왕기전 결승5번기에서는 유창혁을 상대로 타이틀 사냥에 나서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승리할 경우 조9단은 4관왕에 오르는 대신 유9단은 국내기전 무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 조훈현은 88년 이창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부터 「바둑황제」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93년부터는 승률이 60%대로 떨어지더니 급기야 지난해에는 이창호와의 사제대결에서 7승16패의 수모를 당하는 등 젊은 기사들에게 잇따라 무릎을 꿇으면서 승률이 57%(35승26패)로 급강하했다. 하지만 그는 올들어 언제 그랬냐는듯 10년전 전성기 수준의 기량을 단숨에 회복, 당당히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유창혁을 상대로 마지막 5국까지 가는 대접전끝에 상금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기전인 LG정유배 타이틀을 거머쥔 서봉수9단 역시 올들어 현재까지 70%대의 빼어난 승률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침몰시킨 기사 중엔 김승준6단, 김영환5단, 목진석4단 등 결코 만만찮은 신예강호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지난해 바둑전문가들은 서9단이나 조9단의 성적부진을 지적하면서 『중년의 나이에서 오는 체력저하와 집중력 감퇴, 수많은 대국을 통한 전력노출 등으로 인해 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라고 분석했었다. 이제 더이상 이런 상투적인 분석이 통하지 않음을 두 노장기사는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변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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