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일류 식료품점과 화랑, 「플레이보이」지와 「고등생물학개론」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가 70년도 저작 「소비의 사회」에서 갈파한 현대사회의 모습이다.넘쳐나는 사물들의 세계, 각종 매스미디어와 텔레비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계. 그 괴물 같은 현대를 순환시켜 주는 최대의 비밀은 바로 소비다. 현대사회의 균형은 소비와 그 해부 사이에서 이뤄진다는 가설이 대전제. 중세사회가 신과 악마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비라는 화두로 현대를 해부한 이 책은 91년 국내에 첫 출판되자마자 인문사회과학도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당장 문화이론 연구자들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20세기 말의 인문사회이론인 「포스트모던 이론」들 가운데 단연 고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사상적 스승인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부정·격하했을 뿐 아니라, 푸코, 들뢰즈, 료타르 등 당대의 석학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위대 역할을 한 저작.
우리가 매일 접하는 상품이란 공해, 레저, 섹스, 광고, 대중매체 등이며 현대인들은 그런 재화의 소비를 통해 성공과 권위를 과시하고 즐긴다는 것. 따라서 이제 상품은 효용성으로 구분되지 않고, 지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일종의 기호(記號)로 작동하게 됐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란 결국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물화(物化)의 핵심에 놓인다.
특히 후반부는 책의 논의 가운데 현대 대중문화 연구의 분석틀로 흥미를 끈다.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 등 현대인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떠오른 문제를 소비라는 관점에서 해부한다. 양이 확대되고 수가 늘어남으로써 생기는 키치(kitsch·저급 문화)의 범람은 마침내 「시뮬레이션의 미학」을 창출한다. 중간계급 대두의 결과다.
현대 프랑스 인문학 특유의 정교한 용어나 다층 화법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까다로운 저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을 갖고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매력적인 분석틀을 얻게 된다. 르클라시주(재교육), 가제트(실생활과는 무관한 발명품), 앵베스티망(열중·집착) 등 불어권 인문학 특유의 기호학적 용어가 두드러진다.
문예출판사는 지난 2월로 13쇄를 찍었다. 쇄당 1,000∼3,000부를 냈으니 모두 3만 부를 찍은 것으로 출판사는 보고 있다. 인문학서적 시장이 좁은 한국서는 당당히 스테디셀러다.
장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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