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대세가 되었으며, 통일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이 말은 개신교 목사, 성서신학자, 시인, 반독재 민주투사 등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한 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쳤던 고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89년 북한 방문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90년 10월 20일 형집행정지로 풀려 나면서 밝힌 소감이다.
80년 이전까지만 해도 통일문제는 「안보」 차원의 문제로서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고, 당연히 이것과 관련된 논의는 정부의 독점물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통일운동의 고양, 정부 민간 등 다양한 차원에서 진행된 북한 방문과 교류,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이제 통일을 「운동」이나 「안보」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이해관계가 얽힌 삶의 문제로, 현실 정치 차원에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까지 만들었다.
□ 민주화운동과 자주화운동의 결합
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반미의식」이 높아져 민족자주화운동이 본격화한 시기였다. 또 냉전체제가 완화하면서 남북대화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민족민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통일운동도 급격히 대중화한 시기였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을 통해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냉각됐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의 경험은 민주화운동이 민족자주화운동과 결합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아픈 교훈으로 깨닫게 했다.
그리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80),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82),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85), 김세진·이재호 분신과 반전반핵투쟁(86)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자주화운동이 고양되었다. 민주화운동이 자주화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자주화운동이 활발해지고, 이는 곧 통일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돌파구를 마련하게 된다. 87년 「6월항쟁」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에 대한 요구가 얼마나 높은 수준에 와 있는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 80년대 후반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
80년 이후 자주화운동이 축적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던 통일운동은 88년 올림픽 문제와 맞물리면서 급속히 증폭되었다. 또 학생들을 중심으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전개되고 남북학생회담이 추진되었다. 특히 6·10남북학생회담은 4월 민주항쟁 이래 처음으로 민간 주도로 통일문제를 제기하여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통일의식을 높인 점, 각계 각층의 자주적 교류 제안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점, 그리고 통일문제를 관념적 차원이 아닌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통일운동사에서 기록될 만한 의의를 갖는다.
89년 들어 와 청년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투쟁」을 중심으로 남북 자주교류운동이 다양하게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 등의 북한 방문으로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특히 통일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과 부문의 운동이 연대하는 성과를 얻었고, 변혁운동에서 차지하는 통일운동의 위상이 분명해져 자주·민주·통일운동을 상호유기적으로 사고하게 됐다.
□ 문목사의 방북
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와 같은 해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방북은 이 시기 통일운동의 지향과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는 89년 4월 2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함께 『쌍방은 우리 민족이 굳게 단결해야 할 필요성과 그 절박성을 통감하면서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며,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어, 나라의 통일 위업 실현에 적극 이바지 할 데 대한 공동의 염원을 표시하였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공동성명이 암시하듯 문목사의 방북은 단순히 남북한 교류 차원에 그치지 않고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하였던 통일원칙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통일이 어느 한 세력의 독점물이 아니라 전민족적 과제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 통일논의의 전국민적 확산
80년대 후반 통일운동의 대중적 확산은 또 이전에 정권과 관변보수학계의 전유물이었던 통일논의를 전국민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그리고 이때 제기된 통일방안들은 다양성 가운데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어느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배제와 같은 방법으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현실적으로 공존의 단계를 거쳐 통일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공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92년 남·북 간에 합의된 「남북 기본합의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80년대 이전의 통일운동이 비합법 공간에서 조심스럽게 전개됐다면 88~89년에 한껏 고양됐던 통일운동은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더불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에서, 이전의 통일운동과 달리 한층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80년대 말기에 통일운동을 이끌었던 인사들은 위로 60년대 이후 성장한 재야세력과 80년대를 통해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청년·학생이었다.
이제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 둔 시점에서 통일운동은 통일운동 원로 인사의 경륜과 젊은 세대의 역동성의 결합, 노동·농민운동 등 기층대중운동 역량을 통일운동의 동력으로 만드는 문제,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 차원을 넘어서서 한반도의 정치·군사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서 민족적 발언권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과제로 남겨놓고 있다.
다음은 12월 6일에 「한·소 및 한·중 수교와 남북 동시 유엔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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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3월 20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 김중기, 남북한 대학생 공동체육대회
와 남북한 학생 국토순례 대행진 제안
6월 10일 남북한 청년학생회담 경찰 저지로 무산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 「남북 경쟁대결외교 종식, 각계 남북동포
교류 추진, 이산가족 방문, 남북 직접교역」 등을 중심으로
한 대북정책 6개항 특별선언(7·7 선언)
8월 15일 노태우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개최 제안. 전대협이 추진한
8·15 남북학생회담, 경찰 원천봉쇄로 좌절
89년 1월 24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한국전쟁 이후 한국기업인 최초로
북한 방문
2월 8일 남북총리회담 첫 예비회담
3월 25일 문익환 목사 북한 방문. 「통일 논의하러 왔다」는 도착 성명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위해
평양 도착
91년 1월 23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 결성준비위 발족
(위원장 문익환)
12월 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채택
12월 31일 남북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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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통일 제의 자료총람」(국토통일원·85년)
「현단계 통일운동론」(함운경 등·88년)
「현단계 제통일방안」(김낙중·노중선·89년)
「통일은 됐어」(노중선·96년)
「통일, 그 바람에서 현실로」(강만길·유재현·95년)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조희연·98년)
「통일문제와 88년 통일운동」(녹두서평2 가운데 조한백·89년)
「통일운동은 민중운동의 주요한 영역이다」(경제와사회 중 조희연·89년 겨울호)
「현단계 남북관계와 통일운동의 총점검」(사회와사상 중 정대화·90년 4월호)
「1980년대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한국현대사4 중 최영묵·91년)
「통일운동의 역사」(역사와현실 16호 중 정창현 등·95년)
■ 필자 약력
정용욱(鄭容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83년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96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문학박사 86∼97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저서 「탈냉전과 미국의 신세계 질서」(역사비평사, 96년, 편역) 「한국현대사강의」(돌베개, 98년, 공저) 논문 「해방 이전 미국의 대한 구상과 대한 정책」(93년) 「1947년의 철군논의와 미국의 남한점령정책」(94년)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96년·박사학위논문) 등
■대학생 통일운동의 핵, 임종석
정권은 그를 끌어 앉히려 애썼지만, 그는 대중의 바다에서 거듭 났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제3기 의장이었던 임종석(33·당시 한양대총학생회장)씨. 그가 26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 무학빌딩에서 「푸른정치 2000」 소장으로서 사무실 개소식을 가졌다.
89년 7월 임수경(31)을 대표로 평양 축전에 파견,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오면서 통일운동에 새 전기를 마련했던 그다. 『되도록이면 보통 학생의 정서에 부합되는 학생 운동을 하자는 거였죠』 당시 전대협이 제시했던 축구시합, 학술대회, 문화교류 등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죄로 받아쳤다.
최상의 목표였던 올림픽 공동개최가 무산되자, 전대협은 88년 기자회견을 통해 평양축전 참가 의사를 밝혔다. 89년 북조선학생위원회에서 발신된 초청장은 북한적십자-남한적십자-통일원을 거쳐 전대협까지 당도한다. 92년 1월 교류협력 및 불가침 조약체결을 골자로 하는 남북합의서를 이끌어 낸 실질적 계기였다. 임양은 운동화 청바지 등의 밝은 모습과 자유스런 언동으로, 북에서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문목사와 임양의 방북은 현실적으로 통일의 당위성을 체감시킨 계기였죠』 그가 밝히는 의의다.
두 임씨의 첫 대면은 결국 법정에서였다. 각자 재판 때 서로를 피고측 증인으로 불렀던 것. 임양의 월북 전 연세대에서 만날 뻔도 했다. 그러나 삼엄한 경찰 경비망으로 무산돼 위임장만 오고 갔을 뿐이다.
그는 대학 시절을 바쳤던 학생운동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지금은 세계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 이념이 아니라 실사구시를 목표로 삼아야 할 때』라며 『시민운동과 연대를 모색, 사회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푸른정치 2000」은 현재 같은 이름의 월회지는 물론, 인터넷 홈페이지(www.click2000.pe.kr) 등을 통해 활동을 알려나가고 있다. 전대협 시절 이래 함께 한 변호사 박혁묵(35)씨가 가장 든든한 동지다. (02)2294-2021.
원주교도소 수감 중 수많은 서신 왕래로 사랑을 키웠던 김소희(33·프리랜서)씨 사이에 세살난 딸을 두고 있다. 93년 가을에 복학, 4학년으로서 한 학기 를 다녔으나, 1학점이 모자라 아직 졸업은 못한 상태. 89년 2월 수배령이 내려 그해 12월 300여일만에 검거돼 93년, 3년 6개월째 복역중 석탄일 특사로 가석방됐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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