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개인이 있었다. 개인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개인이 하느님이었다. 최후에 개인이 남았다. 멋쟁이 이론가들이 「노마드(nomad·유목민)」라고 부르는 그 떠돌이들은 휴대폰과 함께 있을 것이고, 노트북을 들고 지구의 이 도시 저 마을을 누빌 것이다. 그 개인은 21세기 인류의 이름이다.■ 개인주의 기원은 고대 지중해
태초에 개인이 있었다고? 그렇다. 이 패러디는 요한 복음의 거룩함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 아니다. 인류학자 루이 뒤몽에 따르면, 최초의 개인주의자들은 고대 인도의 탈속적 힌두교도들이나 지중해 주위의 원시 기독교도들이었다.
고대의 힌두교도들이 카스트 제도에 무심한 채 자신들의 내면적 가치에 집착했듯, 원시 기독교도들도 세속의 위계 질서 바깥에서 신과 개별적으로 만나기를 바랬다. 고대의 이런 「세계-바깥의-개인」은 물론 근대의 개인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개인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 캘비니즘을 통해서 확립된 「세계 내적 개인주의」의 씨앗을 고대의 개인주의자들이 뿌린 것은 확실하다.
미셸 푸코도 그의 마지막 저서인 「성의 역사」 제3권 「자기에 대한 배려」에서 개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고대 지중해 세계로 끌어올렸다.
그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 첫번째 거장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개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심을 압축한다. 그를 포함한 많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는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 윤리였다. 그 윤리 속에서 한 개인의 바람직한 삶은 미와 선을 융합시킨 예술 작품에 비유되었다.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자발적 자기 함양이 억압적 도덕의 금제를 대치했다.
■ 서갑숙.복거일을 생각하라
개인들이 돌아오고 있다.
복거일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서갑숙이라는 이름으로. 복거일의 「소수를 위한 변명」과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한국 개인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대표한다.
20세기의 인류사에 새겨진 가장 커다란 상처들이 전체주의의 칼자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개인들의 부활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20세기는 인류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정치 체제로서의 전체주의를 경험한 시대다.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는 한 사회에서 개인의 공간을 완전히 박탈했다. 그것이 그 이전의 독재체제로부터 20세기의 전체주의를 구별시키는 점이다.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나 크메르 루주의 인민 학살 같은 것은 한 사람에게서 개인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집단의 표상만을 읽으려했던 전체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다.
개인의 부활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뜻하는가?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68년 5월의 프랑스 학생 혁명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저항이었다. 그 해 5월에 파리 거리를 누비며 『금지를 금지하라』고 외쳤던 「붉은 아이들」은 체제라는 이름의 전체에 대항해서 자아와 개인성을 긍정했던 사람들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또 한 사람의 프랑스인에게 귀를 기울여보자. 사회학자 폴 요네는「게임, 유행, 대중」이라는 책에서 대중화, 개인주의, 탈정치화를 현대 사회의 본질적 특성으로 꼽고, 미래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이 세 요소의 굳건한 결합이라고 처방했다.
물론 탈정치화한 대중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지닌 선동가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될 때, 민주주의의 바탕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 세계의 대중은 개인적 선택에 민감한 개인주의적 대중이다. 그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파시즘으로 투항하는 수동적 대중이 아니라,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상품의 소비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능동적 대중일 것이다.
■ 모두가 나르시스가 되는것
19세기 후반 이래 이런 개인주의는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미학적 모더니즘의 형태로 실천됐다. 예컨대 보들레르와 랭보는 고전적 작시법에서 시를 해방시켰고, 피카소는 원근법에서 회화를 해방시켰다.
또, 쇤베르크는 조성이라는 성가신 굴레에서 음악을 해방시켰다. 그들의 얼굴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홀렸다는 나르시스의 얼굴이다. 이런 개인주의 또는 일종의 쾌락주의가 소수의 예술가나 지식인이 아닌 대중에 의해 실천되는 사회가 21세기일 것이다. 그 때에는 모두가 나르시스가 되는 것이다. 모두 서갑숙이 되는 것이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에서 서갑숙이 실천하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나 성 해방 운동이 아니다. 그가 수행하고 있는 것은 나르시시즘이고 개인주의다. 그는 자신의 몸에 반했고, 자신의 사랑에 반했다.
그런 반함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그의 책이다. 그는 그 책을 통해서 풍속의 감시자를 비웃으며 개인주의를 실천한다. 그는 21세기형 인간, 나르시스적 인간이다. 그런 나르시스를 심리적 인간(호모 프시콜로기쿠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부유하는 듯한 이 호모 프시콜로기쿠스는 자유를 열망하는 민주주의적 인간(호모 데모크라티쿠스)이기도 하다.
■ 은자.비사교성과는 거리
전체에서 해방된 개인은 원자화한 개인, 탈사회화한 개인일까? 그래서 그는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는 은자가 아니다. 공심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하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과 연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의 「노마드」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과 노트북은 그들이 지구 문명의 망 속에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표지다. 개인주의는 또 이기주의와도 무관하다. 개인주의는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춘다는 고전적 자유관의 심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고, 다가오는 세기에 완성해야 할 혁명은 개인주의 혁명이다. 그 혁명은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혁명일 것이다.
이 혁명이 만들어내고 있는 개인주의는 일상적 삶의 체계적 개성화(또는 프라이버시화)를 유연하고 느슨한 사회화와 묶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출할 것이다. 그것은 풍속을 포함한 문화 전반의 소프트화를 동반하는, 쾌락주의적이고 너그러운 새로운 자본주의와 어울린다. 그 혁명의 주체는 전체가 아니라 개인이고, 수동적인 붙박이들이 아니라 능동적인 떠돌이들일 것이다.
■ 전체주의(holism)는 전체가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과 독립적인 실체이고, 그 부분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이다. 이 용어는 때로 사회적 전체가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세계관이 정치 제도에 극단적으로 구현됐을 때 이를 특별히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고 부른다.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가 그 예다.
이런 의미의 전체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다. 무솔리니는 자신이 구상하고 건설했던 이탈리아 국가를 전체주의 국가(Stato totalitario)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발명자들에게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체주의에 상대되는 말은 개체주의 또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다. 개인주의는 전체주의와 달리 특정한 주체의 관점을 옹호하고 드높인다. 개인주의자들이 보기에, 개인은 고려해야 할 유일한 실체이고 모든 사회적 구성이나 철학적 체계의 최종 목표다.
■ 개인주의자들은 인간의 문제들을 집단의 틀 안에서 사고하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개인은 일반화한 추상물이 아니라 정의 그대로 구체적인 개별자들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개인주의라기보다는 개인주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 개인은 개인주의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지닐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세상에는 개인주의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개인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 셈이다.
개인주의는 크게 존 로크에서 발원해 뒷날 자유주의를 낳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나 막스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 키에르케고르나 니체로 대표되는 귀족주의적 개인주의 따위로 나눌 수 있다. 그 개인주의들 사이에는 다른 점이 많이 있다. 예컨대 막스 슈티르너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이타주의자란 타인의 쾌락을 통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또 니체 같은 귀족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은 가장 뛰어난 사람들, 요컨대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개인주의들은 개인을 전체보다 중시한다는 공통점을 나누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