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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 (48) 88 서울올림픽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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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 (48) 88 서울올림픽 개최

입력
1999.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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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홍순호(洪淳鎬)약력

서울대 문리대 졸. 파리대학 국제관계대학원 석사. 프랑스 소르본대학 국제정치학 박사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 지역연구 협동과정 주임교수 저서 한국 국제관계사 이론(93년), 국제협력론(98년).

■ 160개국 참가한 최대 제전

근대올림픽 부활 92년만에 88년 9월 서울에서 제24회 올림픽이 열린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88올림픽은 남북분단이라는 국제정치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 167개국 중 160개국(북한 등 7개국 불참)이 참가한 가운데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의 성공적 대회였다.

올림픽은 60년 이래 자주 정치문제화해 일부 회원국이 정치적 이유로 불참하는 사태를 빚어왔다. 64년 도쿄올림픽은 북한 등 일부 공산국가들이 IOC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해 불참했다. 68년 멕시코올림픽은 국제정세와는 무관했으나 멕시코 대학생들의 정치적 시위로 개최 전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72년 뮌헨올림픽에서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단체가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해 11명이 피살됐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해 아프리카·카리브해 26개국이 불참했다.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한 미국 등 67개국의 보이코트로 반쪽대회가 됐으며, 이에 소련 등 공산권 14개국은 84년 로스앤젤레스대회 불참으로 보복했다.

88 서울올림픽은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22년만에 처음으로 IOC 회원국 대부분이 참가한 사상 최대의 제전이었다. 따라서 88서울올림픽은 그간 비대해진 국제경기연맹의 영향력, 올림픽을 통해 확산된 민족주의적 시위 그리고 스포츠를 통해 드러난 국가 간의 정치·외교적 갈등과 이질적인 문화권 간의 충돌 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IOC의 전통과 권위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제협력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시험받게 된 것이다.

■ 국가이미지 개선 효과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렸던 서울올림픽은 개최 전까지 역대 올림픽 중에서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가장 말이 많았던 대회이면서도 막상 개최 후에는 대회 운영, 참가규모, 시설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기록됐다.

특히 남북한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소련(러시아) 중국이 32년만에 협력적으로 참가한 서울올림픽은 개최일이 임박하면서 처음의 우려와 달리 성공적인 대회가 예견됐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160개국은 당시 유엔 회원국 보다 1개국이 더 많고 84년 LA올림픽 참가국 숫자보다 20개국이나 많은 것이다. 참가선수 1만3,600여명, 25만명의 관광객, 4,700여명의 보도진, 대회의 위성중계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켰다.

9월 17일의 개회식과 10월 2일 폐회식 행사는 역대 올림픽 중 최대의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이 외국 언론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특히 IOC위원장 특별고문 아디 다카치(당시 70세·유고인)가 30여명의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작성한 서울올림픽 평가보고서는 총18개 평가항목 중 경기장과 연습장 운영, 경기결과 통보 체계, 개회식, 시상식, TV전송, 경기기구의 안전관리, 한국스포츠에 미치는 영향, 올림픽을 통한 국가 이미지 개선 등 절반에 해당하는 9개 부문에서 만점을 매겼다. 한국 갤럽조사연구소가 대회 폐막 직후인 10월4일 발표한 「서울올림픽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95.4%.가 「올림픽을 잘 치렀다」, 91.3%가 「개회식이 잘 되었다」고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의 더욱 큰 성과는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높이고 한국과 소원했던 나라들(당시 공산권)을 가깝게 하는 데 기여해 「불안한 분단국」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 라는 인식을 말끔히 씻어낸 것이다. 또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소련 미국 동독에 이어 종합 4위를 차지함으로써 주최국으로서 체면을 세웠다. 이는 역대 올림픽 개최국 가운데 우수한 성적이다.

■ 북방외교에 새로운 물꼬

서울올림픽은 외교적으로도 큰 성과를 이룩했다. 참가 160개국 중 비수교국은 32개국으로 이들에게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그후 한국의 북방외교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올림픽과 동시에 개최되었던 문화제전을 통해 동유럽, 러시아 예술과의 만남이 우리의 분단문화 극복의 계기가 되었음은 값진 체험이었으며 국악이 지배한 폐회식 공연은 우리의 전통예술이 세계 속에 자리잡으려는 값진 시도였다.

81년 2월 당시 서울시장이 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했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모한 계획」 「허황된 발상」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때까지 20년간 올림픽 개최 장소는 멕시코시티를 빼면 모두 선진국이었으므로 개도국으로서 감히 올림픽 개최를 꿈꿀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림픽을 선진국 도약의 획기적 발판으로 삼자는 국민적 총의가 모아짐으로써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던 것이다.

국제정치의 오염이 심각한 올림픽제전에서 48년 런던대회 때 체코팀 여자 기술위원의 망명요청이나, 56년 멜버른대회 때 헝가리 펜싱팀선수 3명의 미국망명 사건과 같은 골칫거리도 서울올림픽에는 전혀 없었다. 한국은 이 점에서도 완벽한 안전관리에 성공했다. 92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했던 스페인은 합동근무를 통해 「서울의 안전」을 배웠으며 92년 동계올림픽을 열었던 프랑스의 알베르빌과 60개국 영연방대회를 개최할 뉴질랜드도 서울올림픽의 경험을 배웠다. 또 우리는 가난한 나라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유고에 60만달러를 제공하고 대한항공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항공료를 대폭 할인해주는 등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성의를 다했다.

■ 경제적으론 실패한 대회

그러나 올림픽 개최후 한국은 10년이 채 못돼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경제위기를 당하는 나라가 됐다. 이는 그간의 거품경제가 말해주듯 후진국에 시혜를 베풀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허세에 의해 대외협력 관리를 거품으로 장식하려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은 30억달러짜리 제전이었으나 이처럼 막대한 투자에 비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대회라고는 볼 수 없다. 정부는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경제적 성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몬트리올·멕시코·도쿄 올림픽도 막대한 투자의 후유증으로 대회 후 불황을 겪었다. 서울올림픽 10년 후에 나타난 상황이긴 하지만, 한국이 IMF 사태를 맞게 된 것도 서울올림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끝내 불참한 것과 대회 기간 중 반미감정이 높아진 것도 서울올림픽의 어둠이다. 한국은 서울올림픽 개막 한달 전까지 남북한 국회회담·올림픽회담 등을 통해 북한이 참석하도록 접촉을 계속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또 복싱경기를 놓고 심판이 한국에 유리한 판정을 내렸다며 일부 미국 언론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불거진 반미감정은 경기장에서 한국 관중이 미국팀에 야유를 퍼붓는 등 거친 반응으로 이어졌고 미국 선수의 절도사건까지 겹쳐 악화했따. 비록 본류는 아니고 일시적 역풍이긴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한·미 양측에 반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 서울올림픽에 관한 연구

이세기 「올림픽과 국가발전」(전망사, 1984)

홍순호 「88 서울올림픽과 국제협력」(「국제협력론」, 한학문화, 1998)

■동구예술 열풍

한국일보뉴스

1999/11/21(일) 17:55

서울올림픽은 동구 열풍을 몰고왔다. 50여일간 펼쳐진 올림픽 문화축전을 통해 소련과 동구 예술이 첫선을 보이자 문화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데올로기 장벽에 막혀 40여년간 접근이 금지됐던 동구의 물결이 봇물터지듯 쏟아져 들어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의 수준높은 문화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됐던 한국과 동구권 문화의 벽이 무너진 것은 서울올림픽 문화축전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문화로 촉발된 동구 붐은 북방외교의 물꼬를 트며 한국 외교의 도약 발판이 됐다.

서울올림픽 문화축전에 가장 많은 예술가를 파견한 것은 소련이었다. 가장 관심을 모은 것도 소련의 각종 공연이었다. 모스크바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모스크바 방송합창단, 볼쇼이발레단과 한국계 2세 성악가 넬리 리, 루드밀라 남이 처음 왔고 국제현대회화전·국제야외조각전 등에도 소련 작가가 참가했다.

소련의 대시인 예프투셴코가 서울에 와서 한강에서 빈대떡에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소문으로 듣던 명성을 직접 확인하게 된 흥분과 기대는 입장권 매진으로 나타났다.

소련은 서울올림픽 개막 전인 9월4일부터 국영 타스통신 주관으로 「스포츠는 평화」라는 사진전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어 한국과 교류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시했고 그것은 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수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 당시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이끌고 왔던 지휘자 드미트리 키타옌코는 올해부터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폴란드 가르지니차극단의 「아바쿰」, 체코슬로바키아 스보시극단의 「충돌」, 헝가리 기외르발레단의 첫 내한공연도 갈채를 받았다. 그들은 인간 내면을 깊이있게 추구하는 예술성 높은 무대로 큰 자극을 주었다. 미술 분야의 국제야외조각전·국제현대회화전은 소련 10명, 동구권 19명을 포함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38명이 참가, 사회주의권 미술의 자부심을 보여줬다.

동구권 문화예술의 높은 수준이 확인되면서, 서구일변도로 흘러온 한국 문화예술 상황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질 낮은 예술일 거라는 편견은 깨졌고 관객의 눈은 높아졌다. 1920-193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러시아 예술의 영향력이 컸음을 돌이킬 때 우리 문화예술의 오랜 공백이 회복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88년을 원년으로 동구와 문화교류가 시작됐다. 그것이 한국의 문화 역량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음은 물론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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