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교읍내 곳곳 '밥과 이념' 엉킨 빛바랜 상흔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1999년의 한국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쑥스럽다. 평등은 이미 실험이 끝나서 용도폐기된 허망한 가치이거나, 이제는 격절되어버린 과거의 신기루같은 열병의 곰보자국처럼 보인다. 당신들의 근대는 근대성에 미달한 채로 저물어간다. 당신들의 근대는 근대성을 통과하지 않고 그것을 멀리 비켜간 자리에서 무너져간다. 국제금융자본의 지배 아래서 저무는 세기의 황혼에, 평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삶을 쇄신하는 견인력으로 작동되어왔다는 역사인식은 노을에 젖어 시장하고, 그 노을 속에서 「태백산맥」을 읽는 일은 쓰라리다.
지금, 평등이라는 말은 너무 멀어서 아득하다. 그러지말고, 그냥 밥 세끼라고나 해두자. 야산대장 염상진을 따라서 산으로 들어가서, 총맞아 죽고 굶어죽고 얼어죽고 붙잡혀서 매맞아 죽은 수많은 소작농 출신 전사들의 마음 속에 이념화한 평등의 신기루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계급의 이름으로 삶을 추상화하지 않았다.
해방으로부터 1948년의 여순반란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시대는 중세의 끄트머리였다. 근대는 정치구호의 과장어법에 편승하는 유언비어에 불과했고, 삶의 물적토대를 이루는 운명적 조건은 여전히 중세적 소작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농지소유관계였다. 생산물 분배의 원칙과 사회적 신분의 귀천이 모두 이 농지소유 관계에 바탕하고 있었다.
1948년의 이승만 정부는 이 중세적 농지소유관계를 긍정하는 바탕 위에서 정권수립에 성공했고, 적대하는 수많은 밥그릇들 사이의 관계를 재편성할 만한 조정력있는 나라만들기에 실패했다. 지주는 다만 그 아비가 지주인 이유 만으로 목측(目測)이 소진하는 지평선까지의 들판을 소유하는 지주였으며, 소작농은 그 아비가 소작농인 이유로 소작농이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그 아비의 자식일 수밖에 없었다. 춘궁기에 소작농의 어린 자식들은 송화가루를 핥아먹고 입가장자리에 뽀얀 가루를 칠갑을 하고 노랗게 가물거리는 머리를 양지 쪽에 뉘었다. 가난은 다만 물적결핍일 뿐 아니라 학대와 모멸이었다. 밥 세끼와 농토 위에 삶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인간이 법률 앞에서 평등하다는 근대성의 기초는 헛되고 헛된 공염불처럼 들렸다.
여순반란과 빨치산을 바라보는 「태백산맥」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소작쟁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태백산맥」의 소작농들은 봉건왕조가 끝나고 일본식민통치가 물러간 고향에서 제 땅을 갈아서 밥 세끼를 먹을 수 있는 미래를 열망했다. 그 열망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생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혈의 씨앗은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지층 속에, 그리고 솥 안에서 밥이 뜸들어가는 그 비리고 여린 향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밥은 좌익의 밥과 우익의 밥이 따로 따로일 리가 없을 테지만 그 씨앗은 순결한 밥의 씨앗일 수 만은 없었다. 그 씨앗의 앞날에 지배이념화한 좌익과 우익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경영을 도모하는 강대국의 군사력이 끼어들면서 벌교 소화다리는 주검으로 덮였고, 밥이 나오는 들판은 피에 젖었다.
전남 보성군은 해방 이후 군(郡)의 역사를 펴내지 못했다. 보성군의 관찬 「보성군사」는 1995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여순반란에서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 중에, 이 고장에서 벌어졌던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성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벌교는 비옥한 농토와 관련, 대지주가 많았다. 따라서 소작인이 많았던 이 지역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토지 및 소작료 문제로 인한 계급적 갈등이 심했던 만큼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우는 남로당의 토지정책이 농민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새로 나온 유행가 「울고넘는 박달재」가 전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 중세는 유행가를 공유할 수 있을 만큼 매우 가까운, 20세기 말의 동시대인 것이다.
벌교는 포구에 인접한 소읍의 작은 공간 안에 밥과 이념이 뒤엉켜 피흘린 싸움의 흔적들을 응축시키고 있다. 벌교에서 역사는 공간구도 안으로 집중되어있다. 벌교에서 한국 현대사는 산을 잘라낸 단면처럼 지층의 켜들을 드러낸다. 중세의 지층이 현대사 50년의 지층과 나란히 드러난다. 그 켜들은 싸매지 않은 날 것의 상처였다. 그 위에 세월의 딱지가 눌러 붙어있다.
벌교의 소화다리는 포구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밥이 나오는 농경지는 다리의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다. 소화다리는 아무런 특징도 보잘 것도 없는 시멘트 1차선이다. 지금은 다 낡아서 차량통행이 금지되어있다. 14연대 반란병력이 이 다리를 건너 벌교읍내로 쳐들어왔다. 초전에 밀린 경찰은 이미 벌교를 비워놓고 있었다. 반란병력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읍내로 진입했다. 그들은 읍내를 장악한 직후 100여명의 「반동」들을 학살해서 그 시체를 소화다리 밑 갯가에 늘어놓았다. 국군과 경찰이 벌교를 탈환한 직후에 이 다리 위에서는 「빨갱이」와 「통비분자」들이 학살되었다. 계엄군이 다리를 건너왔고, 공산군이 이 다리를 건너왔다.
한 줄의 낡은 시멘트 다리가 역사 속에서 풍화하고 있었다. 이 지구상에 그토록 큰 고난을 간직한 다리는 유고슬라비아의 「드리나 강의 다리」 정도일 것이다. 보성군청은 이 낡은 다리에 잇대어서 2차선 콘크리트 다리를 새로 놓았다. 소화다리는 퇴역되었지만, 철거되지는 않았다. 한국현대사는 이 1차선 시멘트 다리를 건너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너무나 허약한 다리 위로 너무나 거대한 역사의 하중이 몰려들었다. 다리 위에는 주검만이 쌓여갔다. 지금 그 주저앉을 듯한 시멘트 다리는 새로 놓은 다리 옆에 피딱지처럼 들러붙어서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 쓰고있다.
벌교는 자연취락이 확장된 마을이다. 도시계획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이면도로의 얼개는 계통이 불분명한 옛길의 구도 그대로이다. 그 옛길의 구도 속에 역사의 단층들은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었다. 소설 속에서 토벌대가 공짜로 머물던 남도여관(당시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나 지역계엄사령관 이·취임 때마다 열병식이 벌어졌던 남국민학교, 염상진의 야산대가 인민재판으로 「반동」을 학살하던 북국민학교, 지주와 기관장들이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던 남원장요정, 수탈적 고리대금으로 금융자본을 축적해갔던 벌교금융조합, 우익깡패 염상구가 「빨갱이」들을 고문하던 청년단 건물들이 자연취락의 구도 속에 그대로 들어앉아있다.
건물의 구도와 용도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 흔적들은 노래방, 단란주점, 미장원, 약국, 목욕탕, 우체국이 마주보는 일상의 거리 모퉁이마다 들어서서 누렇게 바래어가고 있다. 그 시가지의 풍경은 난해했다. 일상성의 바로 한 치 옆에 그렇게 거대한 역사의 상흔이 잇닿아 있었다. 이 난감한 풍경과 더불어 우리는 21세기로 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소설 「태백산맥」은 용공성 시비에 휘말려있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아직도 묻고 있다. 벌교에서는 거기에 대답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소화다리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의 혼백은 『나는 나의 편이었으며, 내 밥의 편이었다』고 대답할 것 같았다. 벌교 역전 어시장에는 새벽 5시부터 광주리 생선장수 아줌마들이 장사진을 치며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글=김훈기자 사진=오대근기자
◇조정래(趙廷來)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남. 서울보성고,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단편집 「恨, 그 그늘의 자리」 「流形의 땅」, 장편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등.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