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전경감의 도피를 지시하고 1,500만원의 도피자금까지 마련해준 박처원(朴處源·72) 전치안본부5차장은 20세이던 47년 경찰에 투신한 이후 40여년동안 「대공분야에서만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이때문에 그는 아직도 동료들 사이에서는 대공분야의 「대부(代父)」 「대공수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박씨 자신도 오랜 경찰생활을 하면서 남들이 다가고 싶어하는 경찰서장이나 경찰청국장 등의 자리도 「대공 현장이 좋다」며 사양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75년 총경, 82년 경무관 치안감으로 차례로 승진, 치안본부 5차장을 맡으면서 그의 주변에는 소위 대공수사전문가로 이뤄진 「박처원사단」이 형성되기도 했다.
박씨가 대공업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것은 그의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다. 가족들이 북한에서 지주계급이란 이유로 모두 처형된 것.
박씨는 특히 단신 월남하는 과정에서 북한군 보급기지를 습격하다 체포돼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씨는 이후 경찰 대공수사 분야에서 위험한 특수임무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북한에선 그를 암살하기 위해 간첩까지 보낸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의 이름이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진 것은 87년 1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朴鍾哲)군 사건을 은폐지시한 것으로 밝혀지면서부터.
박씨는 박군이 고문으로 숨지자 이 사실을 은폐하고 박군 사망과 관련된 경찰관 숫자도 줄이도록 지시한 혐의로 같은 해 5월 구속된 뒤 96년 대법원에서 징역1년6월에 집행유예3년형이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물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5명인줄 알면서도 2명으로 축소하고 허위진술토록 연습까지 시킨 것은 명백한 범인도피』라고 밝혔었다.
박씨가 이근안사건의 비호세력으로 드러난 이상 그는 또 한차례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그리고 「고문수사의 배후 인물」이라는 새로운 별명도 거부할 수 없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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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민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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