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가족 이야기] 연극연출가 이윤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가족 이야기] 연극연출가 이윤택

입력
1999.11.15 00:00
0 0

한국일보는 각 분야 인사들이 직접 집필하는 「나의 가족 이야기」를 새로 연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아들 딸 등의 가족 구성원들과 운명적으로 맺어져 겪게되는 속내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는 이 시리즈는 가정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할 것입니다. 많은 성원바랍니다. /편집자주아버지는 서정주 시인의 표현대로 「8할이 바람인 남자」였다. 맥고 모자에 검은 안경, 당고 바지에 갈색 구두를 신고 동해 청진항에서 러시아 시모노세키까지 황금 어장을 찾아 헤매는 거간꾼이었다. 경주 양동 이가(李哥) 이학이(李學伊)가 아버님 함자다. 영남 대유(大儒) 회재 이언적의 후예가 떠돌이 거간꾼이 된 사연은 몇 권의 대하 소설로 남을 만큼 방대한 가족사가 될 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이경춘(李敬春). 그는 조선 말기 무명의 시인이었으며 경주 김씨 처녀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의 권위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처녀와 함께 야반도주를 시도한 유례없는 자유연애주의자였다. 청년과 같이 동행한 경주 김씨 처녀의 삶은 개항장으로 열리는 신도시 부산의 역사 속에 편입되었고 물락한 영남 유학자 이경춘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그의 무덤엔 부산철도관리인지묘란 목패가 세워져 있었다고 하니 아마 경부선 건설 현장에 참여했던 하급 사무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 아비를 잃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머니 손에서 부양되는 외동 아들의 인생은 그렇게 아버지에서 내게까지 대물림되었다.

나는 엄연히 아버지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떠도는지 모르는 채 성장한 것이다.

아버지의 방랑성은 일찍부터 시작된 듯 하다. 약관 열 다섯 나이에 동네 친구 셋과 현해탄을 건너간 아버지의 일본 행각은 알 수 없다. 한국계 일본 야쿠자 생활을 한 것은 분명하고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서른 둘 나이에 귀향한 돌주먹이었다는 풍문만 전설처럼 남아있다. 부산 공동어시장 일대를 주름잡는 돈 많은 어장 중개인으로 등장한 아버지 이야기는 그대로 만화같은 전설이었다. 그 점에서 아버지는 외로운 아나키스트였다. 한문으로 시를 짓고 일어에 통달한 유식자가 폭력을 밥 먹듯이 휘두른다는 자체가 체질적인 아나키스트의 피냄새를 풍긴다.

어머니는 「지킴이」였다. 열 칸이 넘는 기와집과 전답을 받고 팔려오듯 시집온 어머니 황두기(黃斗期·83). 그녀는 시집오자마자 일방적으로 남편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다. 한글도 모르는 문맹의 시골 처녀가 낯선 개항장 부산에서 집에 오지 않는 남편을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어머니의 인생은 조선 남성 중심사회가 조장한 여성 비하의 전형적 사례가 된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기다리고 사는 인생을 거부한다. 어느날 문득 집을 나선 어머니는 아버지 뒤를 미행해서 첩의 집을 알아 놓는다. 그리고 쇠망치와 된장을 준비해서 첩의 집을 습격한다. 쇠망치로 첩의 머리통을 일격에 박살내고 그 자리에서 깨진 머리통에 된장을 발라 주었다는 일화는 어머니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시리즈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어머니의 억척 인생은 시작된다. 6.25 전란통에는 미군 부대 통조림 깡통을 타내는 노무자로 나섰고 아버지가 기약없는 가출을 시작했을 때 고향의 산을 몇 고개나 넘나드는 봇짐 장수였다. 옷가지를 한 보따리 이고 집을 나가시면 사나흘만에 돌아오셨다. 어머니가 옷가지 대신 쌈지돈과 쌀을 들고 오시면 나는 밤새 함께 이익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계산해야 했다. 나의 초·중·고교 교육은 어머니가 이고 나가셨던 봇짐의 힘에서 나왔던 셈이다.

그렇게 나를 키우시면서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끝내 귀가하지 않으셨고 결국 1994년 90세를 일기로 빈민촌 도로밑 사글세 골방에서 운명하셨다. 배다른 이복 동생이 아버지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고 아버지의 식은 등짝 밑에는 통장과 도장이 깔려 있었다. 300만원이 들어있는 겉봉에는 아버지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싸인펜으로 또박또박 쓰신 「장례비」란 글자 석자가 선명했다. 자신의 장례비 300만원을 남기고 사라지신 아버지.

그러나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버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빨 빠지는 부위까지 아버지와 똑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나를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아! 내가 아버지를 느끼면서 아버지는 내 속에 들어 오시는구나. 내 딸은 나와 함께 있기를 싫어한다. 주위 사람들이 붕어빵이라고 놀리기 때문이란다. 붕어빵같은 인생유전…. 이것이 가족인가.

◆이윤택은 누구 : 1952년 부산 출생. 서울연극학교 중퇴 후 서적 외판원, 우체국 공무원, 부산일보 기자 등을 전전하다가 연극에 투신했다. 89년 서울에 올라왔고 「어머니」「오구 - 죽음의 형식」 등을 연출. 「문화 게릴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TV드라마 「머나먼 쏭바강」, 시집 「밥의 사랑」 등을 냈다. 현재 연희단거리패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