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만화작품의 소개가 전무한 상황에서 최근 프랑스의 대표적 만화가인 장마르크 레제르(1941-1983)의 대표작 두편이 번역, 출간됐다. 레제르가 70년대에 연재했던 만화를 묶어 펴낸 책 「빨간귀」와 「원시인 1,2」(도서출판 열린 책들) 이다.레제르는 41세에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블랙 유머와 공격적 풍자로 일체의 권위와 제도, 검열, 문명의 위선에 대항한 프랑스의 대표적 만화가이다. 불필요한 요소의 생략과 한 순간에 휘갈긴 듯한 거친 필체로 무겁고 촘촘하며 명암이 뚜렷한 독일만화와는 또다른 프랑스만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
「빨간 귀」는 부모, 교사로부터 「귀가 시뻘개지도록」 늘 따귀를 맞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소년은 성인용 잡지를 봤다고, 부모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는 이유로 매편마다 따귀를 맞는다. 그러나 이 소년은 특별히 악의를 가지지도, 교활하지도 않은 호기심 많고 줏대 센 소년일 뿐이다. 어른과 아이의 이런 일그러진 관계 속에서, 억압과 저항의 사회구조를 풍자하고 있다.
특히 「원시인」 은 절정에 달한 레제르의 기교가 잘 드러난 작품. 아프라카를 배경으로 어리숙하고 미련한 원시인과 동물의 세계가 펼쳐진다. 정겹고, 한편으로는 잔인하기까지 하지만 이 세계의 원시인과 동물들이 기묘한 해방감에 취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의 위악적인 풍자정신 내면에는, 억압받는 자를 옹호하는 따뜻함이 있다.
레제르는 60년 판매금지, 폐간, 재창간을 되풀이하며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시험해온 프랑스 최초의 성인 만화잡지 「하라-키리(割腹)」 의 창간멤버였다.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촌철살인적 유머는 68혁명을 겪으면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70년대 말부터는 제도권내 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져 「르 몽드」 「주르날 뒤 디망슈」 등에 많은 만화를 기고했다. 대표작으로는 「빨간귀」와 「원시인」을 비롯, 「우리 아빠」 「환상들」 「여성만세」 「야외생활」 등이 있다.
정교한 화면분할로, 극화(劇畵)중심의 일본만화 전통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이해하기 힘들고, 산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색다른 만화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에겐 이번 출간이 좋은 소식이 될것이다.
송용창 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