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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칼럼] 가을 베를린의 笑劇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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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칼럼] 가을 베를린의 笑劇 하나

입력
199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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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은 동·서독을 갈랐던 「장벽」이 붕괴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통일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에서는 기념행사가 화려했다.그보다 한달여 앞선 10월3일은, 독일이 통일된 지 9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1999년의 10월에서 11월까지, 베를린의 가을은 마치 묵은 한 세기를 그 자리에서 청산하는 듯한 축제의 계절이 되고 있다.

통일 기념일과 장벽붕괴 기념일의 어간에 베를린을 여행할 수 있었음은 여행자에게도 축복이다. 다소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행담을 털어놓아야 하는 부담이 생긴 것은, 이 축복에 대한 기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인지 모른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동쪽으로 옛 동베를린 시가지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건설현장으로 보였다. 통일독일의 국회의사당이 된 옛 제국의회(라이히스탁)건물은 옥상에 세운 유리돔 하나로 새 밀레니엄의 새로운 독일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탈바꿈한 것이 자못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반나절짜리 도시관광버스를 타고 둘러본 소견을 모두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버스에서 내려다본 한 소극(笑劇)의 장면에 대해서, 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슬픔을 참지 못할 뿐이다.

브란덴부르크문 근처 어느 배경(?)좋은 광장의 한 길가에 버스는 멈추어섰다. 10월하순의 토요일 오전, 버스 안에는 한국의 서강대학교와 독일의 가톨릭사회과학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제2차 한·독학술대회에 참가중인 학자들이 섞여 앉았다.

무심히 바라본 창밖 도로에 벤츠 승용차 하나가 섰다. 동양인 3명이 내려 바쁘게 기념사진을 찍는데, 낮은 계단위에 올라선 신사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히틀러의 흉내를 내는 게 아닌가. 그 다음 신사도 역시 똑같은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고는 부지런히 「다음 사진찍을 장소」를 향해서 떠나갔다.

그들은 물론 웃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옆에 서있던 버스에서 혀를 차며 보고 있는 「관광객」들을 전혀 괘념치 않았다. 독일인들은 웃기보다는 불쾌한 표정이었고 마음 약한 한국교수 한 분은 『한국인은 아닌 것 같다』고 다급하게 체면용 코멘트를 했다.

마음이 조마조마한 사람은 다행히도 나 혼자였던 것 같다. 그들 두 사람 모두 내게는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원외교」에 나섰을 우리 정치인들이었고, 카메라를 들고 차를 몰아 안내하던 사람은 현지 주재 외교관이기 쉽다.

히틀러 흉내는, 독일 지식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그저 우스개나 별것 아닌 일로 삼키기는 쉽지 않은, 감정적 상처가 씻기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히틀러가 세웠고, 한때 히틀러가 섰을지도 모를 장소라고 해서 히틀러 흉내를 내면서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는 우리 정치인의 의식 수준은, 너무 어리고 사려 깊지 못하다.

베를린의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이유로는 안팎으로 여러가지 일이 꼽히지만, 가장 결정적인 독일 내부의 요인은 「정치를 잘했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서독의 정치인들은 한국과 똑같은 분단상황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민주적으로, 정의롭고, 성실한 국가」로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위에 경제적인 성공이 덧붙여져서, 국가의 역량이 강력한 경제력으로 축적되었고 이 점이 동독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면서 동독의 내파(內破)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벽붕괴 10년, 그리고 독일통일 9년이 반드시 성공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한·독학술포럼에서 「독일통일 이후」를 진단한 본대학의 위어겐 아레츠 교수는 ①서독측이 동독인들의 사회주의 독재국에서의 삶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②시장경제체제가 기회이자 모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동독측이 이해하지 못한다 ③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통일에 실망을 느끼는 세력의 대변자로서 공산당의 후신인 PDS(민사당)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점 등을 통일 이후의 「문제」로 제기했다.

여기서, 우리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축제로 들썩이는 베를린의 가을은 부럽기 짝이 없지만, 같은 시간 서울의 가을은 「사생결단」식 여야대립으로 자폭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우리의 정치가 있다. 그들에게는 통일을 위해 우리가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서 국가역량을 축적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대신에 「문건」 하나로 서로 욕지거리로, 장외 삿대질로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저급한 집안싸움이 있을 뿐이다.

그런 한가운데에 독일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히틀러식 제스처로 으스대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정치의 의식수준이 자리잡고 있다./ 정달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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