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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경] 한국 오페라의 대모, '영원한 椿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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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경] 한국 오페라의 대모, '영원한 椿姬'

입력
1999.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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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5-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김자경 오페라단의 제56회 정기공연으로 올라간 「춘희」. 단장 김자경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해 눈이 잘 안 보이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휠체어를 탄 채 무대에 나와 인사를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기쁨에 넘치는 표정으로 뛰어나와 애교 섞인 인사를 던지던 그가 병든 노구를 끌고 등장했을 때 객석은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이 공연 팸플릿 인사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매번 공연 준비 때마다 모든 힘을 소진하여 죽을 것만 같아도 한 편의 오페라가 끝나고 커튼콜이 시작되면 어디로부터 기운이 솟는지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대를 향해 달리고 있곤 합니다』

이날의 김자경은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본 공식적인 마지막 모습이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97년 자서전 「마음으로 듣는 사랑의 노래」를 낼 때까지만 해도 그는 건강했다. 그의 말마따나 늘 28세라는 만년청춘이자 영원한 현역이었으며, 늘 명랑해서 남들을 즐겁게 했다. 말년의 그는 아침마다 영어성경을 공책에 옮겨 적으며 지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한국 오페라의 대모이자 「영원한 춘희」 김자경씨. 9일 82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무대를, 열정적인 삶을 마감했다. 한국 최초의 프리마 돈나이자 민간 오페라 운동에 불을 당긴 선구자로서 평생을 오페라에 바친 그의 삶은 오페라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떠올리게 한다.

1948년 1월 16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원제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됐다. 김자경은 그때 소프라노 마금희와 함께 주인공 비올레타를 맡았다. 닷새간 10회 공연을 했는데 마금희가 목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사흘째부터는 그가 혼자 소화했다. 몹시 추운데도 난방이 안돼 무대 뒤에 숯불을 피웠고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몸을 녹이면서 했던 이 공연은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장안의 화제가 됐다.

■후학 양성을 위해

원산 루씨여고를 졸업한 그는 이화여전 피아노과를 수석졸업하고 48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50년 5월 한국인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갖기도 했지만 낯선 이국에서 그가 느낀 것은 「너무 늦었다」는 지독한 절망감이었다. 한국 성악의 개척기, 모든 것이 척박하던 때였다. 세계적인 성악가의 꿈

을 접고 제자를 길러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58년 귀국 후 이화여대에서 가르치며 소프라노 이규도 남덕우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는 40대 중반에 남편을 잃었다. 도쿄에서 유학한 멋쟁이 화가 심형구.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첫 부임한 이화여고 교정에서 키 큰 미술 선생 심형구를 만나 41년 결혼했다. 당시 그는 아홉살 연상에다 이미 결혼해서 두 아들이 있는 몸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뤘다. 영원한 연인이자 아내를 아기처럼 돌보며 외조를 아끼지 않던 자상한 남편은 62년 해수욕장에서 익사했다.

■제2의 오페라 인생-오생(生) 오사(死)

남편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던 그는 68년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 제2의 오페라 인생을 시작한다. 그해 5월 푸치니의 「마농레스코」로 창단공연을 한 이래 김자경오페라단은 한 해도 거르지않고 작품을 올려 오페라 활성화를 주도했다. 그 전에도 오페라단이 있었지만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였고 김자경오페라단 이후 비로소 정기적인 오페라 공연이 이뤄졌다.

그의 꿈은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한국적 소재의 오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작곡가 메노티에게 위촉해 88 서울올림픽 기념작으로 「시집가는 날」이 태어났고 지난해 11월 김동진 작곡 「춘향전」을 선보였다.

오페라는 성악가 뿐 아니라 무대, 조명, 의상, 오케스트라까지 완벽하게 갖춰져야 제대로 할 수 있고 막대한 돈이 드는 종합 무대예술이다. 열정 하나만 갖고 단돈 100만원으로 오페라단을 창단한 그는 오페라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눈물로 협찬을 요청하는 구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오생(生) 오사(死)」, 오페라에 살고 오페라에 죽는 삶이었다. 남편을 먼저 보낸 후 그는 늘 「성은 오씨요 이름은 페라」인 오서방과 재혼했다고 말하곤 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박수길 국립오페라단장] 김자경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패기 넘치고 꿈많은 20대의 젊은 여학생처럼 사신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선생님께서 한국오페라계에 끼친 영향은 새삼 글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에 비올레타로 출연해 한국 최초의 프리마 돈나로서 이름을 남기셨습니다. 1962년 국립오페라단이 창단될 때 부단장을 맡아 한국오페라의 기틀이 되는 국립오페라의 태동에 이바지하셨고 68년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해 올 봄까지 공연을 이어오시고 국립오페라단과 큰 맥을 나란히 하는 민간오페라단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선생님과 저의 인연은 대학 졸업 후부터였습니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노래 공부하고 또 연구할 때 선생님과의 만남은 저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당시 이화여대 음대 성악과장이셨던 선생님은 여학생들만의 오페라 클래스에 과감하게 대학을 졸업한 젊은 신인 남성 성악가들을 불러들여서 운영하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 오페라계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동료 성악가들과 어울려 저도 이화여대 교정에서 오페라 연주에 참가하는 기회를 가졌고 또한 선생님은 젊은 성악가들을 집으로 데려가 공부시키면서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스튜디오를 연습장처럼 드나들면서 도움을 받았고 1970년 「아이다」 이후 매년 김자경오페라단 공연에 출연하면서 저도 성악가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드립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젊은 성악가들이 선생님의 무대를 통해서 성장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겠습니다.

언제나 젊은이들을 사랑하셨고 젊은이들 편에 서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선생님을 생각합니다. 분명 하늘나라에서도 선생님은 해맑은 웃음을 웃으시면서 오페라의 레치타티보처럼 「내 애인은 오페라예요」라고 노래하실 것입니다. 김자경 선생님, 평안히 잠드시옵소서.

/박수길·국립오페라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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