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프리마 돈나 김자경씨가 9일 타계함으로써 그의 이름은 이제 「영원한 춘희(椿姬)」로 남게 되었다. 1948년 1월 한국 최초의 본격오페라 「춘희(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그는 자신의 영광을 훗날 김자경오페라단 창단과 후학 지도로 연결한 우리 음악계의 큰 공로자다.해방 후의 황폐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춘희」공연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31세에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너무 늦었다』는 절망감을 누르며 그는 공부했고 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다. 미국 80여 도시에서 100여회의 독창회를 가진 그는 귀국하여 이화여대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음악계의 선각자로서 그의 존재가 더욱 빛나는 것은 68년 사재를 털어 국내 최초의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300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오페라야말로 우리 음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김자경오페라단의 첫 작품은 역시 「춘희」였다. 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정기공연 56회, 소극장공연 600여회 등을 통해 한국 오페라를 이끌었다. 다만 열정 하나로 대기업도 하기 힘든 오페라단을 창단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며 발전시켜 온 것이다. 김자경씨 같은 선각자가 가꿔놓은 토양을 바탕으로 우리 음악계는 세계 속에 성장하고 있다.
우리 음악계에서는 지금까지 800회에 가까운 오페라가 공연됐고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활동하는 성악가도 3,000명을 헤아린다. 지난 8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춘희」가 김자경씨의 마지막 무대가 됐지만 그의 오페라단 이름과 함께, 또 「영원한 춘희」라는 애칭과 함께 음악에 헌신한 그의 생애는 길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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