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한영우 지음, 효형출판 발행)이 책은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해서 화성(華城)과 현륭원에 다녀온 뒤 작성한 8일간의 행사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한글로 간추린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철저하고 상세한 국정보고서를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혀를 내두른다. 이 전통은 개혁의 도시 화성 건설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당시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근대적 노사관리의 경험을 쌓게 되기도 한다.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인적사항과 주소, 근무일수, 품값이 일일이 기록된 「화성성역의궤」가 그 증거로 남아 전한다.
기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군주는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千明月主人翁)이라고 자호(自號)한다. 명나라를 구심과 정통으로 삼던 중세적 보편주의가 몰락하고 중화사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조선중화주의의 정신 아래 차츰 민족자존의 전통을 세워나가던 때, 중흥과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든 군주의 도도한 자존심이 배어있는 이름이다. 정조가 번왕(藩王)으로서 사용할 수 없었던 「만(萬)」이라는 글자를 즐긴 사실도 이 점을 시사한다. 화성은 그에게 속국의 틀을 벗고 제국(帝國)으로 뻗어가려는 혁명의 진원지였던 셈이다.
그는 많은 분량의 개인문집을 남긴 당대 최고의 학자였고, 준론탕평책을 통해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시세에 쐐기를 박고 인재들을 고루 등용한 군주였으며, 정통 경학은 물론이요 불교나 남인의 서학, 그리고 노론 청년층의 북학에도 개방적 자세를 보이면서 민본의 근대적 정치실험에 한 걸음 앞서있던 개혁가였다.
이 책의 소재는 왕의 나들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국한되어 있지만, 이를 통해서 정조라는 영명한 군왕의 등장으로 이루어진 체제와 제도와 문물의 변화, 그리고 그 유신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정조의 개혁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위대한 19세기를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식민지로 추락한 배경이라고 입을 모으지만, 이 책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개혁의 준비와 그 기상을 확인하노라면 1800년,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그를 덮친 죽음이 마냥 안타깝다.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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