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386칼럼] '백만학도'는 오늘도 지켜보고 있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386칼럼] '백만학도'는 오늘도 지켜보고 있다

입력
1999.11.09 00:00
0 0

대학 4년간의 기억이 이후의 10년보다 더욱 선명하고 길게만 느껴짐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의무적인 축제감에 강제됐었지만 실상 그 기간은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했던」 시절이었다.운동권과 비운동권을 구별짓는 일도 허망했던 시절. 불법적인 구타, 연행은 물론 꿈도 꿀 수 없는 성고문마저 태연하게 저질러지던 시대. 하루에도 십여 차례나 불심검문을 받으며 여자학우들은 생리대까지 전경들에게 공개 당해야 했던 시절. 우리는 그 역사의 순간순간을 분노와 울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이한열 열사가 일주일만 먼저 눈을 감았다면, 이 땅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민주화의 열망이 극점에 다다랐던 그때, 6·29라는 항복선언이 발표되기 직전 그가 떠났더라면 진정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변혁되었을까.

모든 건 80년대 당시 학번들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심정적으론 동감하면서도 합류할 여건이 안 되었던 「긴쪼(긴급조치)」세대, 넥타이부대, 4·19와 6·3 주역이었던 그 이전 세대들의 동참이 없었다면 과연 독재타도의 실현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거나 훨씬 뒤로 연기되었을 것이다.

말 잔치뿐인 선거철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백만학도」란 단어를 전리품인양 입에 달고 다니던 옛 얼굴들이 갑자기 이름 알리기에 분주해졌다. 그들이 누군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느 학교 출신이고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백만학도는 그들만의 의미일 뿐, 말없이 시대적 요청에 충실했던 젊음들은 따로 실재(實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아무런 보상도 원치 않고 개인의 영달도 바라지 않으며 우리는 싸웠다. 지금의 30·40대들 모두가 그 역사 현장의 생생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386」 또는 「475」라는 숫자로 대변되는 수백만의 당시 학번들은 지금도 두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특정인의 성공과 대안도 없는 용서를 위해 우리가 피땀과 눈물을 흘렸던 게 아니라는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분명하게 전하고자 한다.

역사는 결코 몇몇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모두의 인생 기록이라는 사실, 「백만학도」라는 용어는 그들의 이력서에 장식되는 옛 기억의 메아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자신,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오늘을 이겨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 단어의 실제 주인공인 것이다.

/채지민·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