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땅 변산반도 남단께가 도도록 솟아올라 능가산을 이뤘다. 그 아늑한 산자락을 뒤덮고 있는 울울한 전나무숲을 헤집고 들어가면 어느새 내소사(來蘇寺)가 있었다. 아는 이는 다 아는 절집이니 구차한 설명일랑 다 집어치우더라도 부처와 중생이 만나기에 그만하면 딱 수미산 기슭이라 하겠고 그리 넓지도 않은 경내며 그닥 요란치 않은 당우(堂宇)가 불연(佛緣)에 잠기기에 넘고 차지 않는 곳이다. 때맞춰 온통 봄물이 오른 산에 절과 사람이 흠씬 잠겼다. 볕바라기하기 좋은 대웅전 석축에 걸터앉으면 맞은편 천왕문에 잇대인 야트막한 돌담을 타고 모조리 꽃구름이었다. 불두화며 겹벚꽃에 개벚나무… 미처 이름도 모를 꽃들이 기운껏 화세(花勢)를 어울리고 있었으니 전각 안 부처께서 눈호강이 여간이 아니셨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두리기둥 위 화려한 추녀 밑에는 외려 단청이 바래가고 있는 게 아닌가. 흐려진 꽃무늬, 사람이 그린 꽃도 지는구나! 제대로만 칠을 올리면 누백년을 간다는 꽃단청이건만 그 소리없는 낙화 속에 꽃으로 지은 집은 그렇게 끄먹끄먹 스러지고 있었다. 피어야 꽃이지만 지지 않으면 역시 꽃이 아니었다. 천연의 꽃과 인공의 꽃이 번갈아 피고지는 속에 무슨 인연으로 내가 있었을까.돌이켜보건대 그쯤에서 그쳤으면 아뜩한 선지식의 풋바심 흉내라도 냈으련만기어코 그 순간을 글로 써보고 싶은 욕심을 냈으니 미련한 중생 소릴 피할 길이 없다. 그것이 첫 작품집 「청동거울을 보여주마」(창작과비평사 발행)에 우겨넣은 「꽃으로 짓다」 「내영」과 「인멸」, 단청사(丹靑師) 연작 세 편이다. 전설에 따르면 내소사 꽃단청은 호랑이가 화현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그려올렸다 한다. 어떤 지극한 솜씨가 있어 저렇게 전설이 되어 남았을까. 끝간데 모를 인공은 그렇게 천연과 맞닿고도 이름 석자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민경헌 소설가·66년 청주생·홍익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97년 「현대문학」에 시, 「문학사상」에 소설을 발표해 등단·첫 소설집 「청동거울을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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