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생텍쥐페리 지음, 이상각 엮음
움직이는 책 발행, 7,800원
1944년.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비행사 앙트완느 드 생텍쥐페리는 지중해로 출격을 명령받고 날아오른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왕자」 「야간비행」 「인간의 대지」 등 이름난 소설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 「성채」는 조금 특별한 데가 있다. 소설이 아니라 수필류의 이야기인데다 90여 편의 짧은 글들은 쓰다가 못다 채운, 그래서 아쉬움이 책갈피마다 묻어있는 유고작이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아프리카 대륙을 비행하던 중 엔진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닷새를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사막을 가로지르는 베두인족 대상(隊商)이 나타났고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삶과 죽음의 문턱. 글을 엮은 시인 이상각씨는 그 생사의 기로에서 이 글이 태어났다고 본다. 『생텍쥐페리가 그때 참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영영 헤어날 수 없을 절망에서 자신을 구해준 그를 어떤 절대적인 인간으로 인식하지는 않았을까』
「성채」는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젊음과 늙음, 사랑과 고통 등 인생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생각을 담고 있다. 어느 대목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리고, 또 어느 대목에서는 삶이라는 제국을 지배하는 왕이 되어 그는 희로애락을 넘어서는, 그리고 궁극에는 인생을 헤쳐나가고 초월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수많은 장벽들. 언제나 잘난 체 하는 논리학자, 고지식한 대수학자, 장군, 경찰, 간수, 문둥병자, 창녀…. 하지만 그들은 곧 나의 제국이며 백성들이다. 이제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허영과 무지, 교만과 탐욕, 공포의 성문을 닫아주어야 한다」. 생텍쥐페리는 인생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장처럼 이제 항해를 떠나야 할, 또는 지금 거친 바다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지어주고 싶었던 성채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신의 품 안에서 행복하다는 것, 아무리 나락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 제 발로 일어설 때 인간은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리하고 보살펴야 할 것은 오직 현실이며, 그 속에서 펼쳐진 미래를 찾을 수 있다는 지독한 현실주의.
거친 문장이 적지 않고, 의미 연결이 명료하지 않아 읽는 사람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또 다른 면모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국내에 완역본도 여러차례 나왔지만 원본 가운데 삶의 문제들을 다룬 글과 이해하기 쉬운 것을 추려 새로 편집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이야기들 **
■아들아, 인간은 나무와도 같다. 그것은 씨앗도 아니고, 가지도 아니며,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도 아니고, 또한 죽어버린 땔감도 아니다. …너는 나무와도 같이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이다. 네 자신이 올리브나무의 흔들리는 가지임을 알게 된다면 너는 영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네 조상들, 네 곁의 샘물, 너를 향한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이나 밤의 신선함 이 모두가 영원함을 알리라.(22쪽, 「아버지와의 대화」)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스리고 있는 이 제국은 먹을 것에 대한 욕구보다는 의무의 성격과 작업의 열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 그것은 소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헌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 사물 속에서 그 자신을 재창조하며, 반면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원 불멸의 장인(匠人)은 문명인이다. 또한 싸우면서 그 자신과 제국을 맞바꾸는 자 역시 문명인이다.(38쪽, 「삶과 시간」)
■껍질이 없다면 과실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유의 부재와 행복을 혼동하고 있다. 돈을 쓰지 않는 부자는 진정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산비탈을 오르지 않고는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 볼 수 없다. 어찌 가마 위에서 세상의 아름다운 광경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84쪽, 「안락」)
■창조란 미래에 대한 편견이거나 공상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읽는 새로운 경관이다. 현재란 유산으로 받은 뒤죽박죽된 자료이다. 이를 정리하여 스스로의 유용한 자산으로 바꾸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 (112쪽, 「현재」)
■밤이다. 야영하는 부대의 모닥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다. …창조가 휴식을 취하는 밤. 그러나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밤. 도둑들이 움직이는 밤. 반역자가 성채를 공격하는 밤. 울부짖음이 크게 울리는 밤. 기적의 밤. 사잇잠을 깨는 밤. 그대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그 밤을 지키는 등불이다. 씨앗을 받는 밤, 신이 인내하시는 밤. (242쪽,「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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