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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마당] 가을햇빛처럼 투명하게 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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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마당] 가을햇빛처럼 투명하게 살고파

입력
199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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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어제 끝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손에는 원고지와 지갑이 들려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고등학생들을 바라보는 승객들의 표정이 심상치않다. 시끄럽게 떠들며 몰려다니는 것이 그 분들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일이겠지만 어제까지 교과서를 외우고 오늘은 백일장에 나가 시인과 소설가 노릇을 해야하는 우리도 그리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혜화역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서, 서울대 의대 건물을 지나 한참을 걷는다. 가을 햇빛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머리 속이 혼란하다. 나는 지금 어디로 왜 가고 있는 것인지.

창경궁.「궁」이다. 몇백년 전, 이곳에선 분명 임금의 용포가 땅에 끌렸을 것이다. 궁녀들의 웃음소리가 넘쳤을 것이다. 이곳에서 오늘 우리가 글을 쓰고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왕일지도 모른다. 느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느껴야하고, 별 느낌도 없는 가을날에 대한 글을 써야한다. 이 궁궐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 고궁의 옛주인들처럼 우리도 지금 이곳에 갇혀 글을 쓰고 있다. 갑자기 이 궁궐이 내 집처럼 느껴진다.

눈에 멋진 헤드폰을 낀 녀석이 들어온다. 멋지다. 그러나 이곳은 고궁이다.이곳에까지 와서 꼭 저런 모습을 봐야할까? 분명한 것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멋들어진 배흘림 기둥과 어우러지는」으로 시작되는 이곳의 외국어(?)를 우리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두들 이 사실을 두려워한다.

가을 햇빛처럼 투명하게 살고 싶다. 느끼는 것 그대로 표현하고,생각하는대로 말하고 원하는대로 쓰고 싶다. 모두가 아는 거짓 가면들은 이제 불태워도 좋지 않을까. 원시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소박했을지언정 자신들이 느끼고 생각한대로 원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러나 진실을 가리느라고 우리들에게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시간이 없다. 피곤하다. 집에 갈 때는 지하철에 앉아 가고싶다. 두려워진다. 내가 눈을 감을 때「제작 KBS」라는 로고가 뜨면 어쩐단 말인가. /박형진·양정고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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