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일은 내안의 '그분' 하는일 나는 빈 피리에 불과산 앞에 서면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밀려와 나를 울린다. 구름 사이로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산을 보고 있노라면 온 몸이 감동에 전율한다. 풀잎 곁에 서면 조용한 그 떨림과 맑은 이슬의 눈동자 앞에 나도 모르게 투명해지고, 나무 곁에 나무와 하나로 서면 구름 흐르는 소리가 전해온다. 또 저녁놀빛 가득한 하늘 아래서는 내가 「그분」품 속에 안겨있음을 확인하고 황홀해진다. 나를 넘어서서 위대한 어떤 것, 우주와 연결된 순간을 느낀다. 「나뭇잎 하나가//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툭 내려앉는다//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너무 가볍다」(「미시령 노을」전문)
내가 시를 쓰는 순간은 바로 이런 전율의 절정감 속에서다. 이때는 개인인 나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다. 시 쓰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그분이 하는 일로 믿는다. 비유하자면 나는 한낱 빈 피리에 불과하다. 시를 쓰지 않을 때의 나는 방구석에 기대선 기타거나 바이올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빈 피리에 「그분」이 입술을 대어 호흡을 불어넣고 바이올린과 기타의 현 위에 활과 손이 닿는 순간 악기는 깨어나 생명의 소리를 울린다. 그분과 내가 일체가 되어 우주 리듬의 침묵 속에 산다.
결코 악기는 혼자 울지 못한다. 신금(神琴)이 아니고는. 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몸의 빈 피리에 그분의 소리를 담기 위하여 산을 바라보고 산을 오르며 풀잎과 별과 달빛 길을 걷는다. 내 시의 길은 그분을 찾아다니는 방랑길. 그러다 어느 오솔길에서 저녁 검은 산에 지고 있는 달을 보면 가슴이 쿵쾅 소리 울려 깨진다. 「당신을 껴안고 누운 밤은/잠이 오지 않았습니다//돌 하나 품어도/사리가 되었습니다」(「산달·山月- 山詩 20」전문)
근래 이런 마음의 짧은 시들을 모아 「산시(山詩)」(시와시학사 발행)라는 시집을 묶어냈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은 이렇다. 「구름 밟은 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저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어디로 가고 있는 나무다//서 있으면서 가고 있는 산/풀잎도 여기 앉아서 구름 냄새가 난다」(「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 山詩 54」부분)./ 이성선 시인, 시집 '절정의 노래' 등,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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