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 바꾼 위대한 대통령" - "인권탄압 독재자박정희. 고속압축형 성장으로 한국경제를 선진국 초입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 하지만 30년 넘는 군사독재정권의 신호탄. 독특한 카리스마와 보수 우익의 사상으로 무장한 지도자며 권력가.
올해 10월은 유난하다. 박정희가 79년 10월 26일 밤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에서 총탄에 쓰러진지 20년. 그의 업적을 둘러싼 공과(功過)를 짚어보는 입씨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올해는 어느 해보다 논쟁이 뜨겁다. 한때 정치적 숙적이었던 현직 대통령의 입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정부 예산으로 그 건물을 짓기로 확정했다. 비판 여론이 쏟아지면서 박정희의 잘잘못을 둘러싼 논쟁으로 격화하고 있다.
■공적이냐, 과오냐
지난 정권 가운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대통령을 꼽으라고 묻는 질문에는 어김없이 「박정희 대통령」이 1위에 오른다. 사람들은 그의 저돌적인 경제개발 추진력을 입에 올린다. 전후 50년대의 궁핍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와 삶의 질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대통령으로 그는 많은 노년층, 그리고 중장년층의 뇌리에 깊숙히 박혀있다. 금강산 관광과 서해공단 건설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북한을 다녀온 정주영 명예 회장 일행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마저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더라 하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민주화를 가로막고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그에 못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올해 8월 「이달의 친일 인물」에 박정희를 뽑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박정희 정권을 분단 구조를 고착화한 최대의 걸림돌로 여기고 있다. 창원대 도진순 교수는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의 이중 헤게모니 아래서 구속된 냉전의 전사였고, 경제 발전 또한 냉전 이익을 활용한 것이었다. 경제발전은 민주적 경쟁을 통한 기술혁신이나 생산성 향상보다 정경유착에 의한 자본의 집중, 억압에 의한 노동의 동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계금융자본의 공세 앞에서 국제통화기금 지원이라는 위기를 불렀다』고 지적했다.
■여론은 긍정적 평가가 우세
21일 밤 10시 KBS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인 「길종섭의 쟁점토론」은 박정희의 업적 평가를 두고 대담했다. 시청자 찬반 집계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본다는 사람의 의견을 모았다. 결과는 긍정적 평가가 264명 가운데 152명(57.6%).
김대중 대통령도 5월 박정희 기념관 건립 문제를 끄집어 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6·25 폐허 속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지 못한 젊은 층에서도 그가 이룩해 놓은 경제 발전의 성과에 매료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닥친 문제,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박정희 정권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더 후대의 평가로 남기더라도 기념관을 세워야 하느냐, 마느냐는 닥친 문제다. 정부에서는 100억원의 예산까지 정했고, 「기념관 설립위원회」(위원장 신현확 전 총리)까지 발족했다.
하지만 학자와 시민들의 반대는 만만치 않다. 강만길(전 고려대), 이만열(숙명여대), 조동걸(전 국민대), 최갑수(서울대) 교수 등 17명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및 국고 지원을 반대하는 전국 역사학자 모임」은 25일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비판과 대안」이라는 토론회를 열었다.
조동걸 대표는 이 자리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 경력과 변절의 행태, 또 정책의 실패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이 정권은 피를 흘리며 달성한 민주주의를 기념해야지 왜 일본에 충성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한 박정희 기념관을 세운다고 하는가』고 지적했다. 목포대 박찬승 교수는 『아직 박정희 기념관을 입에 올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차라리 현대사 자료 수집 센터로서 활용할 수 있는 역대 대통령 기록관을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역사학자 모임은 이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및 국고 지원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11월 초 열릴 국회 예산 결산위원회에 국고 지원에 대한 공청회를 요청했다. 또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을 확대하기로 했다. 현 정권의 기념관 건립 정책은 「BK 21」 사업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연극 '인간 박정희' 성황
박정희 전 대통령의 20주기를 맞아 그를 되돌아 보는 연극과 사진전 등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박정희를 최초로 극화한 연극 「인간 박정희」(공연기획사 다운)는 구미에서 성공적으로 발진해 서울과 지방 순회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15일 구미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첫 공연한 연극은 지역 정서까지 겹쳐 17일까지 3일 내내 1,200석 좌석이 매진됐다. 극단은 『사실을 재해석하지 않고 박정희의 인간적인 고뇌, 좌절, 방황에 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11, 12월 중에 대구, 부산, 울산, 마산에서 공연되며 광주 MBC 요청으로 2000년 1월께 광주 공연도 검토하고 있다.
공화당 사무국 출신 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은행나무 동우회(회장 윤주영 전 문공부장관)는 최근 박 전대통령의 어록을 모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책을 내고 25일 대대적인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27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박정희 대통령 20주기 추모 특별 사진전」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주관하고 있다. 박정희_육영수 부부의 모습을 담은 300여 점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박정희를 기록하는 사진과 글은 아직까지는 모두 박정희를 「추앙」하는 사람들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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