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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동 그자리] 지금은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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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동 그자리] 지금은 돌담

입력
1999.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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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궁정동 총소리」의 현장은 「무궁화동산」으로 변했다. 노란 옷의 유치원생들과 10여마리의 비둘기, 열흘 전에 꽃이 떨어져 잎만 남은 무궁화나무로는 당시를 상기하기 어려웠다.북악산과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 풍광좋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 한 때 100가구가 넘게 살았지만 「그 때 그 사건」이후 하나둘씩 궁정동을 떠나 지금은 8가구만 남았다. 20년전 당시의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가구는 그 중 3가구 뿐. 『저녁을 먹는데 총소리를 3번 들었어. 전기, 전화가 모두 나가서 또 제2의 김신조인가 했지』 시해현장에서 불과 30여㎙ 떨어진 궁정동 3번지에서 40여년동안 살아온 터줏대감 이종대(李鍾大·92)씨는 79년 10월26일 밤을 뜬 눈으로 지샜다. 다음날 새벽 인왕산 산행을 나선 할아버지는 총구를 하늘로 향한 채 안가(安家) 앞에 늘어선 20여명의 군인과 맞닥뜨리고서야 「큰 일」이 난 것으로 알았다.

궁정동 한 가운데 안가는 지금은 2,400평의 자그마한 공원으로 변했다. 그리고 주변 어디에도 박정희 전대통령이 비명에 간 장소를 알리는 표지나 흔적이 없다. 최후의 만찬이 열린 안가 「나」동 대연회장 자리엔 여느 공원에선 보기 힘든 10㎙길이의 돌담이 덩그러니 서 있다. 관리사무소 김대명(金大明·41)소장은 『하루 평균 2,000여명이 지나가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 등이 찾은 적은 없다』며 『시해장소를 모르는 주민들 사이에선 음기(陰氣)가 거센 장소여서 돌담으로 막았다는 소문만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지 시해장소에 꽃 이나 조화가 놓여진 적은 93년 공원 개장후 한번도 없었다고 전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양병호 大法판사 "김재규는 단순살인, 내란목적은 없었죠"

『당시의 방대한 사건기록과 판결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영원히 가슴 속에만 묻어 두겠소. 강산이 두번씩 바뀔 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당시 소신에는 변함이 없소』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에서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의 행위가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소수의견을 냈던 양병호(梁炳晧·81·변호사·사진) 당시 대법원 판사. 아직도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노익장을 과시하는 양변호사는 『사건당일인 79년10월26일 범행 직후 그 자리서 김재규가 자신의 부하들을 지휘해 저지른 범행이 어떻게 내란목적의 살인이 되느냐』며 『당시 김재규 범행은 단순살인에 불과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내란목적 살인이 되려면 상당히 넓은 범위의 모의와 조직, 계획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에는 그같은 치밀한 과정이 없었다는 게 양변호사의 설명이다.

대법원은 광주민주화항쟁이 진행중이던 80년 5월20일 김재규 사건에 대해 대법원(14명의 전원합의체)이 8명의 다수의견으로 상고기각 판결을 내려 김씨의 내란음모죄를 유죄로 인정했으나 양변호사는 당시 대법원 판사이던 민문기(閔文基) 임항준(任恒準) 김윤행(金允行) 정태원(鄭台源) 서윤홍(徐潤鴻)씨와 함께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볼 증거가 없다』는 내용의 소수의견을 냈다.

양변호사는 당시 판결을 내리기 석달 전인 2월께 이미 「보안사 2인자」라고 자칭한 40대 남자로부터 『김재규 상고사건을 기각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똑바로 판결할테니 그리 알라』며 매몰차게 거부, 신군부에 미운털이 박혀있던 터였다. 양변호사는 결국 소수의견을 낸 뒤 3개월만인 8월초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서빙고분실로 끌려가 사표를 쓴 뒤 풀려났다.

『서빙고분실에서 조사받던 첫날 밤 보안사직원이 불을 꺼주지않아 잠을 한숨도 못잤소. 다음날 국장이라는 사람이 「당신이 옷을 벗어야 한다. 소수의견을 낸 다른 판사들은 모두 사표를 냈다」고 하더군요. 백지에 「최규하 대통령각하」라고 시작되는 사직서를 써주었소. 보안사 직원들이 30분만에 대법원 사무실에 가서 내 도장을 갖고 왔어요』

양변호사는 법복을 벗은 뒤인 80년~81년 변호사 개업을 위해 당국에 법무법인 설립신청을 냈으나 이마저 거부당하고 7년만인 87년에 겨우 개업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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