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우파 거물정치인인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 총리(80·종신의원)의 마피아 연루 혐의에 대해 23일 무죄가 선고됐다. 6년반 동안의 집요한 검찰수사에 이어 4년을 끌어온 이 재판은 그가 7차례나 총리를 역임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거물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세기적 재판」으로 관심을 끌어왔다. 특히 그의 기소가 이탈리아의 반부패 사정작업인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재판 역시 마니 풀리테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겨져왔다.그러나 결론은 무죄였다. 대다수 정치인은 일단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라며 환영 일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번 재판결과가 결국 마니 풀리테의 한계를 보여줬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검찰 내부에서는 당연히 이번 판결에 대해 『사정작업을 가로막는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공식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처음 검찰의 촉수에 걸려든 것은 총리직에서 사임한지 10개월만이자 마니 풀리테가 시작된지 1년여만인 93년3월. 검찰은 72년부터 92년까지 7차례 총리직을 수행한 그를 이미 오랫동안 추적해왔다. 수사시작 1년여만에 검찰이 밝힌 그의 혐의내용은 그가 마피아 두목들과 유착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식마피아 단원이었다는 것. 검찰은 「찌오(아저씨)」라는 그의 마피아 암호명까지 제시했었다.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 마피아 두목에게 각종 이권을 넘겨주고 재판과정에 간여했으며 암살사건까지 공모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안드레오티는 이번 판결에 대해 『이제 게임은 끝났다』며 기뻐했다. 자오퀸 나바로 로마 교황청 대변인도 이번 판결에 만족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 아르만도 코수타 공산당 당수는 『법원이 이탈리아의 복잡한 역사를 판결할 수 없다』고 말했고 람베르토 디니 외무장관도 『이번 판결은 우리 역사의 한 시대를 되살려주기 때문에 위대한 뉴스』라고 논평했다. 다만 마시모 달레마 총리대변인은『총리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외신들은 이번 판결이 안드레오티의 기민당(DC)을 비롯, 마니 풀리테에 의해 오랜 정치적 보호막을 박탈당한채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일련의 정치인 관련 재판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부패혐의를 받고 튀니지로 피신해 있는 사회주의자당의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는 『이번 판결은 수년을 끌어온 비극적인 광대짓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야권 지도자인 로코 부티글리오네는 『안드레오티의 무죄는 곧 기민당에 대한 무죄』라며 비난했다. 의욕적으로 시작된 마니 풀리테가 결국은 보수 정치권의 높은 벽에 걸려 유명무실해지고 있음을 유추해보게 하는 지적이다.
홍윤오기자
yohong@hk.co.kr
■안드레오티 재판 일지
▲93년 3월27일: 스파돌리니 상원의장이 안드레오티 전총리에게 시칠리아 검사들의 조사 사실을 귀띔해줌.
▲93년 6월30일: 조사 시작.
▲95년 3월2일: 마피아 조직과 연루 혐의에 대한 예비조사 시작.
▲95년 9월26일: 팔레르모 법정서 첫 재판 시작.
▲99년 4월8일: 안드레오티가 마피아 두목과 유착, 그들을 보호했다는 혐의로 검찰이 징역 15년 구형.
▲99년 10월23일: 무죄 판결.
■마니 폴리테란?
「깨끗한 손」이란 뜻의 이탈리아 부정부패 척결작업. 검찰이 92년 2월17일 사회당 경리국장 치에사의 집을 가택수색한 결과 700만리라(370만원)의 현금봉투를 압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가 주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같은 반부패 투쟁에 따라 불과 2년만에 150명이 넘는 국회의원을 포함, 6,000여명이 부패스캔들에 연루돼 수사를 받았고 이중 1,400여명이 기소되는 등 이탈리아에 일대 「사정혁명」이 불어닥쳤다. 안드레오티 전 총리의 경우도 이같은 사정작업에 걸려든 케이스. 디 피에트로 검사는 94년 12월 전격 사임, 대학교수와 공공사업장관 등으로 활동했으며 게라르도 콜롬보 검사가 그의 뒤를 이어 부패척결을 주도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