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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우장춘기념관에 담긴 뜻 - 문창재

입력
1999.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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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제물포를 떠나는 일본행 기선에 한국청년 한사람이 숨어들었다.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낭인들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가담자 우범선(禹範善)이었다. 대한제국 훈련대 제2대장이던 그는 미우라에게 포섭돼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낭인들의 범궐에 앞장선 반역자. 망명 밖에는 살 길이 없었다.일본정부의 보살핌으로 도쿄(東京)에 정착한 그는 일본여자와 결혼해 1898년 4월 아들을 얻는다. 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박사의 탄생이다. 숨어살던 망명자가 8년만에 자객의 칼에 목숨을 잃자, 젊은 미망인은 어린 아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우장춘 소년에게 가난과 외로움과 차별은 숙명이었다.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를 나온 그는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면서 「종(種)의 합성론」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를 일약 세계적 육종학자로 밀어올린 이 논문은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보완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멸시와 차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늘 『네 아버지는 조선의 혁명가셨다』고 가르쳤지만, 그는 한번도 아버지를 입에 올린 일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알고나서, 고국에 참회하고 차별에 항거하는 심정으로 귀국결심을 실행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오무라수용소에 들어가 추방당하는 형식으로 귀국선을 탔고, 귀국후 『피로써 피를 씻은 역사를 명심하자』는 말을 입에 담곤 했다는 사실이 이런 추론의 근거다. 광복 이후 그는 여러차례 오무라 입소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 김병규 초대 경남지사 등이 벌인 환국촉진운동에 힘입어 50년 3월 8일 처음 고국땅을 밟았다.

일본인 부인과 자녀 여섯을 남겨두고 단신으로 부산에 도착한 우박사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 관사에서 혼자 살면서 책과 씨앗에 파묻혀 살았다. 농업과학연구소장, 임시농업지도요원양성소 부소장, 원예시험장장 등으로 일하며 종자개량과 농업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우리말이 서툴어 바깥출입을 꺼리게 되니 돈 들 일도 없어, 얼마 안되는 월급도 태반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가족에게 그것을 보내지 않고, 연구와 후학지도에 필요한 책을 사는 데 썼다.

수도승같은 연구생활의 결실은 혁명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잎이 밖으로만 뻗쳐 속이 차지않던 재래종 배추가 단단하게 알이 들어 맛 좋고 큰 배추로 개량되었다. 농민들의 수입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일본 밀수품에 의존하던 종자문제까지 해결되었다. 무 양배추 감자 오이 토마토 귤 등 수 많은 작물의 수확성이 최고 4배까지 늘어나고 병충해에 강해졌다. 장미 카네이션 국화 같은 꽃들도 그의 실험실에서 품종이 개량되었고, 생애의 숙원인 벼의 일식이수(一植二收) 연구에도 큰 진척을 이루었다. 후학들은 우박사의 이런 업적을 세종대왕의 농사직설에 버금가는 농업의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지난 21일 부산 온천2동에 우박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동래구청이 6억원을 들여 그의 관사 터에 연면적 200평 규모의 2층건물을 완공한 것은 지난 2월이었는데, 전시품 수집이 늦어 개관을 미루어 왔다고 한다. 고인의 손때가 묻은 유품과 기념물이 많을수록 좋지만, 그가 선대의 욕된 역사를 씻기 위해 어떻게 일생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돌아오지 않을까봐 여권을 내주지 않았던 정부는 그의 임종을 사흘 앞둔 59년 8월 7일 건국후 두번째 국민포장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조국이 나를 안아주었다』고 기뻐했다. 일방통행식 고국애로 일관한 그의 생애는 후세들에게 나라와 겨레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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