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21일에도 천용택(千容宅)국가정보원장을 무고와 직권남용,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국정원 도·감청 의혹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당지도부는 『모든 법적·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끝장을 보겠다』며 불퇴전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여야 구분없이 자기 전화를 편한 마음으로 쓰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돼버린 도·감청 문제에 대해 한나라당이 의혹 제기를 하는 것은 야당으로서 당연한 책무라 할 수 있다. 과거 정권 때의 불법 도청 실상이 어떠했건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광정(匡正)돼야 마땅하다는 데에도 별 이견이 없다.
문제는 수십년 집권 경험을 훈장처럼 내세우는 한나라당의 대응이 과거 야당의 마구잡이식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가 정보기관의 편제 등을 폭로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사안의 본질에 대한 실증적 규명이나 객관적 검증 노력없이 정치공세에만 몰두하고 있다.
현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혔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의 무한공격은 분명 효험을 보았다. 그렇지만 국가 정보기관을 소재삼아 정치게임을 한 한나라당의 태도는 수권능력마저 의심케 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역대정권의 계승자인 한나라당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솔직한 시인이나 반성없이 상대방 때리기에만 열을 올리는 것은 잘못』이라며 『공동여당에서 빠져나온 표가 야당으로 넘어오지 않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자가진단했다.
도·감청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정권교체 후 여야관계는 유사한 상황의 반복이었다. 이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물론 집권여당에 있다. 극한 대여투쟁이 야당파괴와 「이회창 죽이기」에 맞선,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집권경험이 있는 정당으로서 비전이나 대안제시 없이 여당 흠집내기에만 급급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당내 역학구도 등 집안사정도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 등 당지도부는 주요 고비마다 정치로 풀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당 균열을 막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투쟁성과 선명성을 앞세운 「초선(初選)당」이 돼 버렸다. 부산지역의 한 의원은 『한나라당내에서 정치력을 갖춘 중진들의 역할 공간은 이미 소멸되다시피 했다』며 『이총재 등 당지도부의 취약한 리더십이 정치의 하향 평준화를 불렀다』고 지적
했다. 홍희곤기자
hgh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