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삶과 호흡하는 거장장휘거를 찾기 위해 고생 끝에 TV에 출연한 열세살의 대리선생 웨이(웨이 민치)는 아무말도 못했다. 관객까지 초조한다. 당황한 여자진행자는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장휘거라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소녀는 눈물부터 흘린다. 그리고 한마디. 『장휘거, 나와 함께 돌아가자』
자잘한 에피소드로 웃음과 즐거움과 슬픔과 안타까움을 주던 「책상서랍 속의 동화」는 여기서 모두를 울린다. 웨이 민치는 시나리오조차 한번 읽지 않았다. TV출연이 낯설었고, 마지막 장휘거 이름이 나왔을땐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어떤 계산이나 연기보다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그 장면을 촬영할 때 감독 역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거장은 자기를 드러내지 말아야할 때를 안다.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작은 것이지만 거장과 잘난 척하는 감독의 차이다.
거장은 처음부터 거장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틀이 정해진다는 얘기다. 또 이런 말도 있다. 거장은 변화의 시점을 안다.
장이모(張藝謀·49)감독. 88년 「붉은 수수밭」으로 중국 영화의 독창성과 위력을 세상에 알린, 첸카이거와 더불어 중국 제5세대를 대표하는 감독. 그가 21일 밤 부산에 왔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책상서랍 속의 동화」가 폐막작(23일)으로 상영되기 때문이다. 60년대 우리의 어느 시골학교 어린이들을 보는 듯한 이 영화는 싯누런 황토와 붉은 천으로 상징되는 중국 전통의 색채, 촬영감독 출신다운 미학적 구도와 상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국두」 「홍등」등 그의 초기 영화들은 문화혁명의 깊은 상처를 숨기지 못한 채 중국인의 역사와 이상과 억압에 집착했다. 그러나 장이모는 역시 거장이다. 과장된 시각적 구성과 형식미가 인물의 내면심리를 짓눌러 버린다는 조심스런 비판이 고개를 들 쯤인 92년 그는 중국인의 삶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주이야기」는 그가 형식미를 버렸다는 선언이었고, 「인생」은 보통 중국인과 호흡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의 실천이었으며 「책상서랍속의 동화」는 자연스러움의 원숙한 표현이었다. 『모든 감독은 전작의 틀을 깨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그는 초라하고 시시해 보이지만 아주 작은 이야기에서 예술작품을 재창조해 냈다.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해 앞뒤를 얽어가는 방식. 그는 이를 『전형적인 중국식』 이라고 했다. 마치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해 커다란 바다를 만들어 가듯. 「귀주 이야기」 는 촌장의 발길질이 사회제도와 봉건 가부장제도까지 나아가며 「인생」은 평범한 남자의 30년 인생으로 중국역사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이를 위해 장이모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접근을 선택했다. 마치 몰래 카메라로 찍듯 그가 담아내는 아주 단순하고 개인적인 영상과 인물들은 「경극」처럼 화려하거나 그의 이전 영화처럼 미학적 세련미는 없지만 지방색이 살아았는 중국 「희극」 처럼 정감이 넘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비록 무대가 농촌과 대도시란 차이는 있지만 개인적인 삶을 소재로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제6세대와 연결되고,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의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도 닮았다.
문화혁명의 깊은 상처와 굴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장이모 감독. 「유화호호설」로 서구화한 젊은 중국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지만 그것은 6세대 감독에게 맡기고 그는 농촌에 집착한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들의 생활이 중국장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상서랍 속의 동화」에도 그런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다 그의 영화가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감정이다.
여전히 마음놓고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중국. 그래서 『심의가 첫째 고려사항이고, 그 다음이 제작비고 세번째가 예술』이며, 『「책상서랍 속의 동화」의 마지막 해피엔딩도 결국은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였다』 고 솔직히 밝히면서도 그는 『내가 잘 아는 중국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 고 말한다. 검열과 할리우드 공세 사이에서 때론 신음하면서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중국에서 영화를 만들겠다』 고 한다. 지금 찍고있는 영화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 이번에는 작은 농촌학교에서 벌어지는 사랑이야기다. 그는 점점 중국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국에는 왜 거장이 없으며, 한국영화가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암시해 주는듯 하다.
■감독이 되기까지
50년 중국 시안(西岸)출생 68-78년 하방(下放)으로 농장에서 일함 78년 베이징영화학교에 합격했으나 나이 제한(22세)에 걸려 거절당했으나 문화성장관에게 편지를 써 두달후 촬영학과 입학을 허락받음 83년 장준카오 의 「한사람, 여덟사람」, 84년 첸카이거의 「황토지」 촬영 86년 우티엔밍의 「낡은 우물」에 주연으로 도쿄영화제 남우주연상 88년 「붉은 수수밭」(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으로 감독 데뷔 「국두」(90년) 「홍등」(91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귀주이야기」(92년,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 여우주연상) 「인생」(9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상하이 마피아」(95년) 「유화호호설」(96년) 감독, 오페라 「투란도트」 베이징 공연 연출(98년).
■장이모와 공리
장이모 있는 곳에 공리(鞏悧·34)가 있다. 바늘과 실이었다. 장이모는 베이징중앙희극학원 3학년인 그를 「붉은 수수밭」의 주인공으로 기용했다. 파격적이었다. 이후 둘은 늘 함께 작업했다.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서초패왕」 「인생」 「상하이 마피아」로 이어지며 장이모는 거장으로 공리는 월드스타로 부상하며 칸영화제 심사위원까지 맡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일도 8년만에 끝. 공리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 장이모가 아내와의 관계 청산을 계속 미뤄 지쳐버린 공리는 갈등 끝에 95년 공식 결별을 선언했다. 장이모는 『그래도 작품은 계속하고 싶다. 공리는 노력, 천부적 자질, 머리의 3박자를 갖췄다』고 말했다. 세계적 담배회사 「555」의 중국지역담당 사장과 사는 공리 역시 『영화와 사생활은 별개. 앞으로도 영화작업은 계속 함께 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아직 두사람이 새 작품을 함께 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책상서랍 속의 동화'
뭐라 야단 치면 실실 비웃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까딱 않는 장휘거. 그애가 사라졌다. 속 시원하겠다고? 아니다. 선생님은 어머니 병간호 갔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28명 학생들 중 한명도 없어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게다가 아이들을 잘 지키면 10원을 준다 했으니 어쩐다? 장휘거를 찾아오자.
때로 사람들은 「내가 더 고생했다」는 식의 내기를 한다. 「내가 어렸을 땐 배 껍질을 긁어 먹었다」 「차표 대신 달걀을 냈다」는 식이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 그러나 싱싱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이런 「가난 체험담」은 날가는 줄 모른다.
올 베니스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장이모 감독의 「책상서랍 속의 동화(Not One Less)」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처럼 싱싱하고 유쾌한 소품이다. 우울한 감독의 얼굴, 그보다 더 무거운 「붉은 수수밭」이나 「홍등」같은 「아트와 가깝고, 재미와는 먼」 이전의 영화들과는 퍽 달라졌다.
북경에서 자동차로 4시간반 거리의 벽지에 위치한 슈쿠안 초등학교. 웨이 민치는 어머니 간호를 위해 학교를 비운 가오 선생(가오 엔멘) 대신 아이들을 한달 동안 맡게 된다. 13세 소녀에게 교사 일은 벅차다. 노래를 가르치다 가사를 까먹고, 선생님이 하루에 한개씩만 쓰라고 신신당부한 분필도 장휘거와 싸우느라 다 부러뜨렸다. 밤에 오줌을 싸지 않기 위해 한밤중 잠자지 않고 달리기를 하던 학생이 도시로 뽑혀간 것도 걱정스러운 데 장휘거마저 돈번다고 사라졌다.
웨이가 장휘거를 찾는 길은 막말로 「무대포」 정신으로 포장됐다. 벽돌 나르는 일로 차비벌기가 쉽지 않은 것을 깨달은 아이들. 두시간동안 땀흘린 댓가로 받은 돈으로 「可口可樂」(코카콜라)두 병을 사서 나누어 마서버리고는 , 웨이에게 무임승차를 권한다. 그러나 쫓겨난 웨이. 무작정 걸어서 도착한 도시의 기차역 앞에서 하루종일 장휘거를 기다린다. 꾀를 내서 밤새도록 벽보를 쓰지만 그것도 허사. 심인(尋人)광고 부탁을 하기위해 방송사 앞에서 무장적 묻는다. 『국장님이세요』
아이들이 버스비를 계산하는 장면, 웨이가 한자 한자 벽보를 써가는 장면, 이런 단순한 장면이 반복되는데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카메라 앞에 생전 처음 서보는 모든 배우(영화속 이름이 모두 본명)들의 탁월한 연기와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포착한 감독의 재주 때문이다. 해피엔딩은 다소 어색하지만 이 역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않고 싶다는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느껴질 만큼, 감정이입이 자연스럽다. 30일 개봉.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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