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매년 이맘 때면 어김없이 노벨상 소식이 날아든다. 후진국 국민의 열등감 때문인지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선진국의 잔치라는 생각을 이미 굳힌 터라 스웨덴 한림원의 발표 소식을 무덤덤하게 대하고는 하였다.그런데 그 배경이야 어찌되었던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있고 해서 올해에는 슬그머니 관심이 쏠리기는 하였다.
결과는 전(前)과 동(同). 괜히 또 한번 못난 국가의 열등감만 자극한 꼴이 되었다. 그 답답한 마음을 잘 삭히지 않았던지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한국인 과학자가 장황하게 보도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이제는 수상국의 반열에 끼어야 된다는 국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노벨문학상이다. 문학은 정신의 깊이와 문화적 풍요함에서 배태되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기에 문학상 수상자 한 명쯤 갖고 싶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과학이 뒤처져 있다는 거야 어찌할 수 없지만, 문화적으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나라라는 국제사회의 인식에는 괜한 오기가 발동한다.
과학기술이 그러하듯, 문학작품은 인류사회가 공유하는 보편적 자산이다. 그렇지만 수상자의 작품에 스며있는 치열한 작가정신과 그런 글쓰기를 가능케 만든 사회의 문화적 저력에 대한 부러움은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하기야 노벨문학상 자체도 일종의 국제정치적 속성을 갖고 있기에 수상자 선정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고안하면 가능하기는 할 터이다.
재작년인가 장애인의 정신세계를 개척했다는 공로로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는 스톡홀름에서 십여년을 활동했으며 여기에 일본재벌들의 지원이 컸다는 소문이다. 한국문학을 국제화하는 프로그램과 조직을 가동하면 안될 일도 아니다.
우리의 문학계를 돌아보면 수상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더러 발견되기는 한다. 사견임을 전제로 박경리, 서정주, 고은이 선두그룹일 터이고 최인훈, 이청준, 이문열, 조정래 등이 다음 그룹을 형성할 것이다.
시집이 수 만권 팔려나가고 일간지에 베스트셀러 광고가 대문짝 만하게 나는 나라가 한국이고 보면 문학에 대한 열정도 그만하면 남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신문광고는 독자들을 얄팍한 글읽기의 세계로 안내하고,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둘러싼 상술(商術)과 치부(致富)의 세계로 작가들을 유혹한다. 이른바 걸출한 작품은 사람들의 가변적 정서에 호소하기보다는 사회의 가장 민감한 교감신경을 건드리고 그것을 시대정신으로 치유하는 사상적 긴장을 갖추어야 한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문학이 있었다. 그들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정신세계를 뽐냈다. 그런데 풍요한 시대가 도래하자 문학은 없어졌다.
전경린, 은희경, 신경숙, 공지영, 하성란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저널리즘과 출판사의 상술이 가난했던 시절의 긴장을 대체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문학성을 자랑하지만 한국문학이 앓고 있는 정신빈곤증을 치유하지 못한다. 하기야 이런 결핍증을 문학계 탓으로만 돌리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노벨문학상이 요구하는 정신문화의 품격에 도전하는 작가들이 다수 나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자질있는 젊은 작가를 결코 놔두지 않는 매스컴의 생리, 모험적 이탈과 신선한 저항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권력의 중심부인 서울과 그것의 반문학성, 일상세계를 파괴하는 작가와 작품을 불량시하는 사회의 고정관념과 인식의 폭력, 명성에 눈이 멀어 표절을 마다하지 않는 인기작가의 몰염치, 상술에 물들지 않은 권위있는 문학상의 부재, 무엇보다도 제도권 밖의 전업작가들이 대중과 함께 시대적 고민을 나눌 공론장이 없다는 것 등이 한국문학과 작가를 빈곤상태로 내모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송호근=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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