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새 천년의 강대국 판도는 어떻게 바뀔까?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세기말에 유행하는 지적 작업의 하나다. 굳이 학문 연구가 아니더라도 소비 추세를 읽어 앞으로 인기 끌 상품을 예측한다든가 하는 상업 목적으로 이런 작업은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초대 총재를 지냈고 유럽연합의 산파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가 쓴 「21세기 사전」은 꽤 이채로운 미래 예측서다. 400여 개의 용어를 뽑아내고 그 미래상을 짚어본 이 책은 겉 모양은 백과사전을 닮았지만 내용은 에세이와 흡사하다. 과학과 논리성을 앞세우고, 또 명민한 예지력으로 넘겨 짚어 아탈리가 펼쳐보인 미래 세상의 모습에서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아탈리가 독특한 「유목사회론」을 펼쳤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전에서도 그는 다음 세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유목민」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유목민의 가치와 사상, 그리고 욕구가 사회를 지배할 것으로 본다. 부유한 하이퍼 계급은 휴대폰, 노트북, 스크린 안경 등 갖은 유목 물품으로 무장하고서 즐기기 위해 또 더 생산적인 곳을 선점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닌다.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이동해야 한다. 결국 누구나 유목민이 되는 것이다. 기업과 가정, 국가도 이런 유목의 성격을 갖게 된다. 국가란 국경을 기본으로 하지만 유목민이 늘어나면서 울타리를 확장할 수밖에 없다. 아탈리는 유럽연합 등 지역 공동체가 잇따라 생겨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레고 문명」 이라는 아탈리의 독특한 개념도 주목해 볼만하다. 아탈리는 미래 문명은 특정한 문화권을 중심으로 결속되는 단일한 형태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종교 중립적인 서양 모델을 중심으로 모든 문명이 융합한 형태를 띤다고 예측한다. 개인은 다양한 문명 철학이나 이데올로기, 정치체제, 문화, 종교, 예술 같은 요소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가치 체계를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은 레고 블럭을 쌓는 것과 같다. 이런 문명의 새로운 모습은 필연적으로 미국 편향적인 문명을 축소시키는 쪽으로 나갈 것이라고 본다.
아탈리는 미래의 모습을 무조건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풀이하는 용어들의 앞날에는 암울한 미래의 모습이 더 많다. 「사람들은 모두 혼자만 진보하기를 꿈꾸고 개인주의는 더욱 정당화하고 불평등은 한층 악화한다.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국가가 가장 극심한 불평등을 겪게 될 것이다」(불평등), 「인체의 복제와 기억의 복제로 모든 사람이 일종의 불멸성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복제 이미지와 복제 인간들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복제 이미지는 다른 복제 이미지를 파괴하도록 프로그래밍되고 바이러스는 복제인간의 기억이동을 방해한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자들 간의 전쟁」(불멸성). 아탈리가 보는 미래는 목가적인 낭만이 풍미하는 유토피아라기보다 만인의 투쟁이 깊어질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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