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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50대 사건을 통해 본 격동의 한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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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50대 사건을 통해 본 격동의 한세기

입력
1999.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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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현姜尙炫(43)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언론학) 교수, 언론홍보대학원 교학부장

계간 「언론과 사회」 편집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약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언론학 박사)

90-97년 동아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94-95년 한국사회언론연구회 회장, 부산민주언론운동협의회 공동대표 97-98년 한국방송학 회 연구이사 및 총무이사 98.12-99.2 방송개혁위원회 실행위원

저서

「제3세계 커뮤니케이션론」(공역, 나남, 87년) 「정보통신혁명과 한국사회」(한나래, 96년) 「현대사회와 매스커뮤니케이션」(공저, 한울, 96년) 「대중매체의 이해와 활용」(공편, 한나래, 96년) 「시민과 함께 하는 지식정보사회」(공저, 대화출판사, 99년)

◆연구자료

「한국방송 60년사」(한국방송공사, 87년) 「문화방송 30년사」(문화방송, 95년) 「해방50년, 언론50년」(한국언론연구원 미간행자료집) 「대중문화의 이해」(김창남, 한울, 98년)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원용진, 한나래 발행, 97년) 한국, 조선, 중앙일보 80년 11월9일~ 12월31일자

80년 12월 1일 오전 10시 30분. KBS 1TV에서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던 「수출의 날」기념식을 실황중계했다. 국내 첫 컬러TV 방송이었다. 같은 해 12월 22일 KBS 2TV와 MBC도 예정보다 앞당겨 컬러 시험방송을 개시함으로써 당시의 국내 3개 TV방송 모두 컬러방송체제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어린이 프로와 스포츠, 영화, 뉴스 등을 중심으로 하던 컬러방송 비율을 급속히 확대, 81년 2월에는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컬러로 방영됐다.

당시 언론들은 컬러TV시대의 개막을 「안방 속의 색채혁명」 에 비유하는가 하면, 앞으로 「다색(多色)문화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기도 했다.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색채의 충격」을 걱정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컬러TV 방영이 본격화되면서 80년대와 90년대에 걸친 20년간 국민 일반의 의식과 생활문화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흑백TV 수상기 보급률이 거의 80%에 달했던 80년에 컬러TV가 도입되면서 흑백TV는 급속히 퇴조를 보인 반면, 컬러TV는 예상보다 빠르게 보급돼 86년에 전가구의 50%를 넘어섰고, 94년에 이르러서는 1가구당 1대가 넘는 컬러TV 보급률을 보였다. 이 기간은 동시에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군사정권으로부터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정치 민주화의 진전을 보인 시기였다. 그리고 사회적 다양성의 증가와 신세대 지향적인 소비대중문화의 팽창이 급속히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컬러TV 방영의 시작은 다분히 경제적,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했음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이 대중문화의 지형변화에 미친 영향은 장기적이고도 누적적인 후속적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컬러TV 방영 문제는 70년대 중반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소비풍조 조장과 계층간 위화감 조성, 그리고 에너지(전력) 과소비 등을 이유로 반대해 왔었다. 그러다가 10·26사태가 터지고 5공화국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컬러TV 방영은 예상보다 앞당겨지게 되었다.

당시 국내경제는 2차 석유파동과 국내정세 불안 등이 겹치면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특히 가전업체는 계속되는 수출부진에다 국내 흑백TV 시장마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됨으로써 최대의 불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불황 타개책으로 당시 정부는 컬러TV 등에 대한 특별소비세율 인하조치와 함께 컬러TV의 조기방송을 결정하게 됐다. 예상보다 빠른 결정이라고 하지만, 당시 우리 나라의 컬러TV 방송은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매우 늦은 시작이었다. 51년 미국에서 첫 컬러방송이 시작된 이후, 일본은 60년, 영국과 홍콩은 67년, 당시 자유중국은 69년에 컬러방송을 개시했다. 아시아권에서 컬러 방영을 않고있던 나라는 한국과 네팔, 라오스 뿐이었다. 북한도 이미 74년 4월부터 컬러방송을 하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컬러TV 도입으로 가전업계는 대호황을 누렸다. 수상기는 품귀현상이 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당시 3저 현상 덕분에 경제도 반등세로 돌아섰다. 컬러TV 방영 결정이 1차적으로는 가전업계를 위한 산업구제정책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도 함께 깔려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5공 신군부 정권은 컬러TV 방송 허용을 국민에 대한 일종의 「시혜」로 삼아, 이를 소비대중문화 확산의 도구로도 이용하고자 했다. 일종의 「탈정치화 기획」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컬러TV 방송을 허용하기 바로 전날인 11월 30일은 언론 통폐합조치에 의해 기존의 민영방송(동양, 동아, 전일, 서해, 한국FM방송 등)이 종방을 한 날이었다. 명분은 공영방송 체제로의 이행이었지만, 실제는 권력에 의한 방송통제와 방송을 통한 대중조작의 구도를 완성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5공 정권은 「방송」을 죽이고 대신 「컬러」를 살린 셈이었다.

컬러TV 방영으로 인해 방송사 차원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쇼, 드라마, 뉴스 등의 프로그램이 대형화되고 자연색을 담을 수 있는 야외촬영이 확대되었으며, 출연자의 분장과 의상은 물론 스튜디오의 장식이나 조명 등이 훨씬 섬세해지고 화려해졌다. 문화매체로서의 TV는 사람들의 색채감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의식과 생활 양식에도 일정한 변화를 자극했다. 일반 국민들의 컬러TV 시청시간이 지속적으로 늘어남으로써 TV를 통해 보는 「다색의 세계」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수용하거나 실제 모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인 준거틀을 제공해 준 셈이었다.

컬러TV 보급과 TV 시청 시간의 확대는 80년대 이후의 대중문화 지형에도 직간접적인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80년대 중반까지 정치적으로는 흑백의 단순 논리가 지배적이었지만, 5공 군사정권은 문화적으로는 특히 컬러TV를 통해 감각적인 소비대중문화를 보급하는 데 열중했다. 젊은 층을 겨냥한 각종 쇼 프로와 새로운 대형 스포츠 프로가 컬러 TV의 주된 장르를 이루었다. 컬러 영상에 어울리는 가수와 탤런트, 배우, 모델, 코미디언들이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대중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나중에는 운동 선수들이 이에 가세했다.

특히 81년부터의 야구를 비롯 각종 스포츠가 프로화 하고,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경기 등이 이어지면서 스포츠 중계는 새로운 대중스타를 만들어내는 또다른 창구가 됐다. 이들 대중스타들은 그 이미지에 따라 다양한 제품의 TV광고 모델로 기용되고, 보다 역동적인 컬러광고를 통해 대중문화나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소비를 자극했다. 시청자들의 색채감각에도 변화를 주면서 다색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다. 그 영향은 특히 어린이와 젊은층에게 강하게 미쳤다.

90년대에 우리 사회에는 신세대 문화의 열풍이 강하게 일었다. 이들이 바로 「컬러TV」 세대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컬러TV를 보면서 자라난 이들 10대들은 기성의 「흑백TV」 세대와는 다른 문화적 감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색깔과 문화의 색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로부터 긴장감을 갖지않는 비교적 자유분방한 세대들이다. 컬러로 표현되는 세상을 보면서 자란 그들은 자신들을 컬러풀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세대들이다. 그들의 얼굴이나 복장은 물론 그들이 즐기는 공간에는 컬러가 넘쳐난다. 컬러는 그들의 문화인 동시에 이제 그들의 자연이기도 한 것이다.

컬러TV 방영개시 후 20년이 지나면서 색채문화는 우리 사회 전반에도 점차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왔다. 어느새 우리는 단조롭던 길거리의 건물이나 조형물이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바뀌어 가고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흑백의 신문과 잡지, 도서들이 형형색색의 컬러 지면으로 바뀌어 이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61년의 흑백TV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80년에 우리는 컬러TV를 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른 「안방 속의 색채혁명」앞에 서 있다. 2000년부터 지상파 디지털TV 시험방송이 시작된다. 와이드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고화질의 디지털TV (HDTV)는 「제2의 컬러TV 혁명」을 몰고 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1세기 우리문화와 의식에 디지털화한 색깔의 공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북이산가족찾기는 컬러TV연출 최대작

83년 6월30일 밤10시15분. KBS TV는 한국방송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을 시작됐다.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당초 방송시간은 95분. 우선 놀란 것은 신청건수였다. 27일부터 30일까지 무려 2,200여건. 이중 몇건을 골라 방송하기로 했던 KBS에는 방송시간을 4시간 15분으로 연장해도 모자랐다.

1.4후퇴때 부산에서 헤어진 4촌남매 8명을 다시 만난 신영숙씨를 첫 상봉자로 850가족이 출연해 36건의 상봉이 이뤄졌다. 흰 종이에 간단히 적은 신상명세서, 그것을 보고 전화를 하고는 방송국을 찾아온 가족. 머뭇머뭇 서로를 확인하고는 포옹과 통곡, 그리고 절규했다. 40년의 길고 긴 이별의 설움은 방송국을 울렸고, 전국을 「눈물의 바다」로 만들었다.

전국의 이산가족들이 KBS로 몰렸다. 7월 1, 2 이틀사이에 1만4,780건이 접수됐고 12일에는 10만건이 넘어섰다. KBS 건물은 물론 그 주변은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인파와 벽보로 뒤덮였다. 얼굴의 작은 점까지 잡아내는 컬러TV, 가구당 85.8%(876만 1,639대)의 TV수상기 보급율의 위력이었다. 11월 14일 새벽4시에 막을 내리기까지 138일동안 총 453시간45분의 방송시간, 출연인원 5만3,162명에 1만189건의 상봉.

전국 53.9%가 이 프로그램을 새벽 1시까지 본 적이 있으며 88.8%가 눈물을 흘렸다고 대답했다. 한국일보는 KBS,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매일 이산가족찾기 명단이 실린 호외를 발행해 나누어 주어 상봉을 도왔고,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그해 9월에 열린 제6차 세계언론인대회는 「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했고, 이듬해 세계평화협력회의는 KBS에 방송기관으로는 처음 「골드 머큐리·애드오너램상」을 안겼다.

「이산가족찾기」는 『컬러TV가 국민을 스포츠화, 오락화 한다』는 비난에서 다소 벗어나게 해주었다. 컬러TV의 화려함을 이용해 프로스포츠, 「국풍」같은 관주도 이벤트, 오락프로그램의 대형화에 앞장서온 방송에 공영성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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