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안이 13일 미 상원에서 끝내 부결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신뢰는 크게 손상됐다. 미국정부는 그동안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의 일환으로 일체의 핵실험을 금지하고 있는 CTBT의 국제적 이행을 주도해 왔으나 스스로 이를 이행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을 드러냈다. 이로써 미국은 비확산 외교의 주도권에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은 물론 CTBT의 존속 여부까지 도전받는 상황이 전개될 것 같다. 또한 내년 대선에서 외교정책에 관한한 별다른 이슈가 없었던 판에 이 문제가 민주·공화간의 큰 쟁점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이는 또 임기말을 맞아 클린턴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을 확실히 드러낸 것으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문제와 동티모르문제 등 산적한 외교과제의 처리에서도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상원이 이날 표결을 실시한 과정에서 클린턴의 어려움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클린턴 행정부와 민주당 지도부의 거듭된 표결연기 요청에도 불구하고 상원의석 100석중 55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은 이날 오후 전격적으로 표결을 실시, 비준안을 부결시켰다. 클린턴은 공화당측의 요청에 따라 문서로 공식화해 표결연기 요청을 했으나 공화당측은 다시 비준안을 재상정하지 않겠다는 점을 약속할 것을 요구, 완강한 태도를 고수했다. 표결결과 의결정족수(상원재적 3분의2 이상)인 67표에 훨씬 못미치는 48표(민주당 45표 + 공화당3표)만이 찬성했고 반대 51표, 기권 1표의 결과로 집계됐다.
실상 이번 비준안부결은 예견됐었다. 지난 97년초 비준안이 상정된 이래 『CTBT가 북한 이라크 이란등 이른바 「깡패국가」의 핵실험을 제지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비준반대를 주장하던 공화당측은 지난달 30일 2주일이내에 비준안을 표결처리키로 갑자기 결정했다. 이에 수적열세로 인해 비준안이 부결될 것을 우려한 클린턴 행정부는 즉각 공화당 의원들을 상대로 전면적인 로비에 나섰으나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다급해진 클린턴 대통령은 12일 의회에 표결연기를 정식요청하는 등 비상수단을 폈으나 끝내 강경기류에 편승한 공화당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이같은 미국 정가의 기류는 국제적 신뢰보다는 미국의 자체안보를 우선시하는 보수적 안보논리가 팽배해 있음을 말해준다.
지난 96년9월 유엔에서 채택된 CTBT는 현재 154개국이 서명했으며 영국, 프랑스, 한국등 51개국이 비준했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syyoon@hk.co.kr
■클린턴 임기중 재상정 힘들듯
미 상원에서 부결된 CTBT 비준안은 일단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중에는 되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법률적으로는 의회에서 부결된 안건이라도 당해 회기연도가 지나면 행정부가 다시 상정할 수 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도 내년 1월1일 106차 의회의 2차 회기연도가 시작된 후 CTBT 비준안을 상정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원의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공화당이 당론을 바꾸지않는 한 클린턴 대통령은 재상정할 수 없다. 부결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작정 재상정해 보겠다는 것은 미국의 정치관행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 12월 실시되는 선거에서 어느 당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느냐, 또 상원의 의석분포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CTBT의 운명이 달려 있다. 만일 현재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화당의 조지 부시 텍사스주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아니면 공화당이 여전히 상원의 다수당으로 남게 되면 CTBT는 재생의 여지가 없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영.불.일 등 26개국 비준 마쳐
CTBT가 발효되기 위해 반드시 비준해야 하는 의무비준국은 핵능력을 이미 보유했거나 개발중인 것으로 알려진 44개국이다. 이중 5대 핵강국에 속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 일본과 캐나다 등 26개국이 비준을 마쳤다.
그러나 나머지 5대 핵강국인 미국과 러시아, 중국은 서명은 끝냈지만 비준은 아직 하지 않거나 실패한 상태. 그래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등은 미 상원의 비준 표결을 앞두고 보낸 공동서한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넘겨줄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미 상원이 CTBT를 비준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잠재적인 핵개발국인 북한이나 핵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비준은 커녕 서명조차 하지 않은 상태여서 군축 전문가들로부터 전세계 핵확산금지체제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국가로 취급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아직 서명움직임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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