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상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한국전쟁 당시 1기갑사단 출신의 재향군인들은 피란민 사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급박한 전시상황이었다는 점을 강조,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회고했다. 제대군인인 에드워드 L 데일리는 『왜관교의 경우 인민군의 남진으로 밀려드는 피란민을 저지하기 위해 피란민 머리 위로 경고 사격을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참전병사들은 또 50년 8월3일의 교량 폭파는 후퇴작전의 일환으로 상부의 명령에 의해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제14 전투공병대 병장 출신의 캐롤 킨즈먼은 『이틀간 3,000㎏의 폭약을 덕승교에 설치했다』며 『폭발과 함께 다리가 산산조각났고 다리 위에 있던 피란민들이 강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킨즈먼은 또 『우리는 전날밤 내내 다리위를 건너오는 사람들을 조사했으나 민간인으로 위장한 인민군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같은 부대 출신의 조지프 이포크는 『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외쳤지만 다른 병사들이 「폭파해야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하루전인 2일 벌어진 피란민 학살과 관련, 에드워드 데일리는 『민간인으로 보이는 북한군이 나타나 발포했고 즉각 응사해 사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다른 참전용사 유진 헤슬먼은 『인민군은 애초부터 없었다』며 『적군이 피란민 사이에서 나왔다고 오판해 민간인을 사살했다』고 엇갈린 증언을 했다.
이보다 1주일전쯤 벌어진 서울 남동쪽 피난민 포격사건과 관련, 1기갑사단 재향군인인 제임스 맥리어는 『이름이 기억나지않는 대령이 포대에 무전을 보내 피란민이 남하하지못하도록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한편 다리 폭파를 명령한 1기갑사단의 호바트 게이 장군은 미군 전사를 편찬하는 육군 사가(史家)에게 보낸 원고에서 『피란민이 퇴각하는 미군을 끊임없이 따라붙었지만 인민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이었기때문에 다리를 폭파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낙동강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흘뒤인 7일께였다』고 미군 자료는 밝히고 있다. /워싱턴= 연합
■왜관지역 주민 반응
미국 AP통신의 왜관교 폭파 및 피란민 수백명 학살 보도를 접한 경북 칠곡군 왜관지역 주민들은 미군의 다리폭파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희생자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왜관교에서 500㎙가량 떨어진 집에서 피란준비를 했다는 장동환(張東煥·68·사진·경북 칠곡군 관호3리 769의1)씨는 『미군 공병들이 8월3일 어둠이 내린후 교량진입을 완전히 통제한뒤 미리 장치한 폭약을 점화, 다리를 폭파했다』며 『다리가 끊겨 강을 헤엄쳐 건너다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왜관읍장을 지낸 이상천(李相天·69)씨는 『당시 미군의 소개령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신동재 부근까지 피란을 가다 폭음을 들었다』며 『만일 희생자가 있었다면 김천 금릉등 다리 북쪽에서 내려온 외지 피란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칠곡=정광진기자
kjcheong@hk.co.kr
■당시상황 재구성
1950년 8월 한국으로 온지 며칠밖에 안된 호바트 게이 미 1기갑사단장은 초조했다. 전쟁 발발 6주가 지났지만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는 인민군 3개 사단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전선 구축이 절실했다.
8월3일 게이 장군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왜관교 앞에서 지프에 기대선채 끝없이 이어지는 피란민의 물결을 향해 경고 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피란민은 남행을 멈추지않았다. 게이 장군은 갑자기 신경질적인 어투로 『저 놈의 다리를 날려버려』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와 동시에 귀를 찢는 굉음과 동시에 수많은 파편이 하늘로 치솟았다. 다리 위를 지나던 피란민 수백명은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낙동강의 흙탕물로 떨어졌다. 강물 전체가 흰옷 입은 사람들의 절규로 가득찼다.
왜관교에서 40㎞ 하류에 위치한 길이 195㎙의 덕승교 폭파도 이보다 약간 먼저 일어났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공병들이 이틀에 걸쳐 다리 곳곳에 폭약을 설치했고 게이 장군은 어김없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오전 7시 폭발과 동시에 다리는 산산조각났다. 남쪽길을 재촉하느라 아침식사도 거른 피란민들은 거의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노약자였다.
피란민들은 다리가 끊긴 후에도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 당시 피란민 김복종(73)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낙동강을 헤엄치던 여자와 아이들이 남쪽 강변에 닿기전 지쳐 물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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