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석화(電光石化). 12일 파키스탄의 군사 쿠데타가 그랬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실각이 발표된 13일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쿠데타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정규 방송이 중단된채 음악이 나오는 정도. 『주요 시설에 군인이 배치된 것 외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다』고 현지 주민들은 말했다.『비상계획을 갖고 모든 상황에 대비해 왔다』는 군 고위관계자의 말처럼 쿠데타 과정은 신속하고 빈틈이 없었다. 쿠데타 주도군은 이번에 권력을 장악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이 거친 파키스탄 정예 특수부대였다.
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2일 오후5시(현지 시간)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 해임」이라는 샤리프 총리의 짤막한 성명 직후. 샤리프 총리가 웃으며 후임 지아우딘 부투 중장과 악수하는 모습이 TV 방송된지 1시간뒤 국영 TV방송국으로 군인이 들이닥쳤다. 방송이 중단됐고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공항 등 주요 시설이 트럭에 나눠 탄 군에 속속 장악됐다.
군은 총리 관저를 포위, 샤리프를 감금하는 한편 무샤히드 후세인 정보장관, 사르타즈 아지즈 외무장관, 무샤히드 후세인 공보장관 등 핵심 각료도 감금했다. 부투 중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항이 폐쇄돼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이 취소됐다. 중앙은행은 현금인출에 대비, 13일 하룻동안 은행업무를 중단시켰다. 파키스탄 사상 4번째 쿠데타는 무샤라프 해임 발표후 2시간만에, 무혈(無血)로 이뤄졌다.
군 대변인은 『샤리프 총리의 축출이 신속히 이뤄졌으며 아무런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며 『군 전체가 무샤라프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군 병력이 이슬라마바드를 비롯, 주요 도시에서 이동하자 일부 국민이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고 춤을 추는 등 샤리프 총리의 실각을 환영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그 무렵 군총사령관 무샤라프는 카라치 공항을 통해 스리랑카에서 갓 귀국, 군 수뇌부와 향후 사태를 협의하고 있었다. 스리랑카 창군 50주년 기념식 참석차 출국했다 귀국 비행기안에서 해임 소식을 접한 그는 한때 입국을 못할뻔 했다. 『샤리프 총리는 내가 입국하지 못하도록 항공기 착륙을 금지시켰다. 다행히 신의 도움으로 군이 신속하게 움직여 정부의 음모가 좌절됐다』고 그는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그는 모든 상황이 끝난 13일 새벽 2시50분 TV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 정부가 모든 국가기관을 조직적으로 파괴했으며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 정국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이 나섰다』 대국민연설을 마친 무샤라프는 군용기 편으로 이슬라마바드로 향했다. ·이슬라마바드 =
정희경기자
hkjung@hk.co.kr
■파키스탄史
파키스탄은 47년 영국군 철수와 동시에 인도에서 분리독립한 인구 1억3,000만명의 회교국가. 독립이후의 세월중 절반 가량을 군부가 집권하는 등 전쟁과 종교분쟁으로 불안이 끊이지않았다.
58년 소장출신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후 아유브 칸 장군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군부집권이 본격화했다. 71년 동뱅골지역이 인도지원으로 방글라데시로 독립, 내부 위기가 증폭되자 현 야당 총재인 베나지르 부토의 부친 줄피카 알리 부토가 권력을 넘겨받았다. 73년 민주헌법이 채택되고 부토 대통령은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77년 지아 울 하크 육군 참모총장이 쿠데타로 부토정부를 전복시키면서 군사독재가 재연됐다. 지아 대통령은 8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같은 해 총선을 통해 베나지르 부토 여사가 총리에 올랐다. 회교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로 신망받던 부토 여사는 90년 8월 정책 실패와 친인척의 부정부패 등으로 해임됐고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회교민주동맹(IDA)이 승리, 나와즈 샤리프 당수가 총리에 취임했다. 부토여사는 93년 총선에서 승리해 재집권했으나 96년 또다시 경제정책 실패와 부패혐의 등을 이유로 물러나야 했고 97년초 실시된 총선을 통해 샤리프 IDA 당수가 다시 집권, 파키스탄을 이끌어왔다.
전국민의 98%가 회교 수니파인 파키스탄에서는 그동안 수니파와 소수 회교파인 시아파간의 종교 갈등이 계속돼왔고 일부 국민은 기독교와 힌두교를 신봉, 종교 문제가 정치 불안정과 함께 커다란 국내불안 요인이 돼왔다. 경제면에서 파키스탄은 여전히 1차 산업인 농업이 국가경제의 중추이며 주로 목화 옥수수 밀 쌀 등을 재배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97년 현재 2,600달러이며 외채가 300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나 제1의 도시는 인구 1,200만명의 카라치로 파키스탄 경제의 중심이다.
/이슬라마바드 AFP DPA=연합
■무샤라프는 누구? 군강경파 이끈 인물
파키스탄의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페르베즈 무샤라프(58) 육군 참모총장 겸 합동참모위원회(JCSC) 위원장은 군부내 강경파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98년 10월 자항기르 카라마트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의 12번째 지휘관이 된 그는 이후 인도와의 카슈미르 분쟁 처리를 둘러싸고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계속 불화를 빚어 왔다.
무샤라프는 64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의 퀘타에 있는 명문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한 뒤 포병연대에 배속돼 이듬해 인도와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보병사단, 육군 특수부대 등을 두루 거치면서 다양한 지휘 경험을 쌓았다.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그는 퀘타의 지휘참모대학과 국방대학에서도 근무했다.
그는 군·민 합동의 국가안보위원회를 구성, 국사를 처리하자고 제안한 뒤부터 샤리프 총리의 파키스탄 회교연맹(PML)의 강력한 반발로 사임한 카라마트 전 육참총장처럼 온건파인 샤리프총리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샤리프총리가 최근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 카슈미르에서 회교 게릴라들을 철수시키자 그는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샤리프 총리는 2주전 무샤라프의 임기를 2001년 10월까지 2년 더 연장,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을 모색하는듯 했다. 정부는 당시 그의 임기 연장 조치가 육군 지휘부 변동에 대한 소문들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샤리프 총리는 12일 태도를 돌변해 무샤라프가 스리랑카를 방문한 틈을 타 전격 해임했고, 그는 쿠데타로 응답했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각국 반응
12일 발생한 파키스탄 군부 쿠데타에 대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일제히 우려를 표명하며 민주주의의 회복을 촉구했다. 특히 카슈미르 분쟁의 당사자인 인도는 전군에 경계령을 내렸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세력인 연합전선(UF)측은 『파키스탄인에게는 불행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밝혔다.
제임스 루빈 미 국무부대변인은 12일 브리핑을 통해 『미국은 이번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할만한 정보를 아직 갖고 있지않다』며 군당국에 헌법준수를 촉구했다. 루빈 대변인은 『파키스탄에서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는 가능한한 빨리 민주주의의 회복을 명확히 요구할 것』이라며 『파키스탄에 민주주의가 회복될때까지는 미국과 파키스탄 관계가 평상시처럼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루빈 대변인은 미국이 이번 사태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부인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도 외무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로빈 쿡 영국 외무장관은 『파키스탄 군은 환상을 갖지 말라』면서 『영국은 비헌법적 행동을 강력 비난한다』고 말했다. 로이드 액스워디 캐나다 외무장관도 『영연방이 파키스탄을 영연방에서 제명하는 문제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는 12일 국가안보위원회 회의를 긴급 주재했다. 총리실 대변인은 『심각한 우려를 갖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전군에 전면 경계령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도 외교부 성명을 통해 『파키스탄의 상황변화에 깊이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 런던 파리 베이징 외신=종합
■카슈미르 분쟁이란
이번 쿠데타의 주요인이 된 카슈미르분쟁은 50년이상 계속돼온 파키스탄과 인도의 「화약고」.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북동부에 위치한 이 지역에서는 1947년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의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한 이후 영토권 문제로 양국간 전쟁과 갈등이 계속돼왔다. 독립당시 이슬람 주민이 다수였던 카슈미르 지역은 파키스탄에 귀속될 예정이었지만 이 지역의 힌두지도자가 군사원조를 대가로 인도에 통치권을 넘김으로써 분쟁의 씨앗이 싹텄다.
49년 1차 인·파전쟁 이후 서부 아자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 나머지 잠무 카슈미르는 인도령으로 귀속됐지만 영토다툼은 65년 2차전쟁, 71년 3차전쟁으로 계속됐다. 72년 UN관할 통제선(LoC)이 설정됐으나 양국은 각각 접경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켜 항상 전면전 가능성이라는 팽팽한 긴장이 지속됐다. 98년 5월에는 양국의 핵실험으로 갈등이 고조, 대규모 포격전이 전개됐으며 99년 6월에도 인도의 이슬람 반군 소탕작전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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