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 체스왕꺾은 컴퓨터 바둑
1999/10/13(수) 18:03
새 천년의 과학기술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두뇌스포츠로 평가받는 바둑을 정복할 수 있을까. 「신산(神算)」 이창호를 무너뜨릴 만큼 똑똑한 컴퓨터는 과연 등장할 것인가.
현 단계에선 인간의 두뇌구조와 똑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완성되지 않는 한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컴퓨터는 이미 서양의 체스를 정복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바둑의 광대무변한 세계 앞에선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한 상태.
97년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딥 블루」는 1초에 2억가지 행마를 검색하는 계산력, 피로를 느끼지 않는 체력으로 세계 체스챔피언 카스파로프를 꺾어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 바둑에 도전장을 내밀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체스는 칸수가 64개이고 말 놀리는 법이 정해져 있어 컴퓨터로 연산하기에 적합하지만 361개의 점 위에서 아무런 제약없이 돌을 놓는 바둑은 사실상 유형화가 불가능하다.
바둑은 가로·세로 각각 19로의 유한에서 무한의 수가 나온다. 먼저 흑은 반상 361개의 점중 어디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 다음 백은 나머지 360점중 어느 곳에서도 응수할 수 있다. 초당 2억개의 행마를 탐색하는 딥 블루도 바둑에서 돌 하나가 가져오는 모든 가능성을 다 계산하는데 수년이 걸릴 것이다.
더욱이 체스에서는 한 개의 말만 잃어도 대세가 결정될 수 있지만 바둑에서는 한 지역의 싸움에서 많은 돌이 잡힌다 해도 승패는 나머지 돌이 다 놓여봐야 알 수 있다. 대만의 잉창치(應昌期) 교육재단이 140만달러의 상금을 내걸고 바둑 소프트웨어 개발을 적극 장려하고 있지만 아직껏 기력이 7급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 기술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진보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서울대 정치학박사 출신인 프로기사 문용직(4단)씨는 『거대 자본력을 지닌 IBM같은 회사가 막대한 인력과 돈, 시간을 투자해 인간에게 도전할 바둑전문 슈퍼컴퓨터를 만들어낸다면 바둑도 더이상 안전지대만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일본·중국 등 동북아 3국에만 국한된 바둑문화가 전세계로 파급돼 지구촌의 관심사로 떠오를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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