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자 우리나라 물리학계는 『이휘소(李輝昭·1935-77·사진)박사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공동수상자가 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2명의 네덜란드 물리학자인 토프트, 벨트만의 수상업적은 고(故) 이휘소박사의 주된 연구테마였다. 평소 토프트가 가장 존경하는 물리학자로 꼽아온 이휘소박사는 72년 토프트와 처음 만나 노벨상의 씨앗을 뿌렸다.
당시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수였던 이박사는 안식년을 맞아 프랑스 파리 교외의 고등입자연구소에서 연구중이었다.
이박사는 71년 양자전자기이론을 연구하기 시작, 이론이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음을 처음 제시했다. 이번 노벨상을 안겨준 토프트의 72년 연구논문이 학계 공인받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박사에 대한 토프트의 각별한 존경심은 그가 79년말 국내에서 열린 이박사 추모 강연에 참가, 특강을 한 사실에서도 알수 있다. 그는 현재 서울대 물리학과가 BK21 과제 중 하나로 추진중인 「초끈이론과 양자중력」이라는 국제협력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이휘소박사는 누구인가
서울에서 의사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난 이휘소박사는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 입학할 만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수재였다. 54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 유학하면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60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28살에 펜실베이니아대 정교수가 됐다.
그는 72년 발표한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논문에서 소립자의 전자기작용과 약작용력을 통합하는 게이지장 이론을 증명, 세계 소립자 물리학계의 정상대열에 올랐다. 또 74년에는 쿼크라는 소립자의 존재를 수학적 논리로 증명해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한때 퍼졌다.
그러나 그는 77년6월 가족을 승용차에 태우고 콜로라도로 가던 중 트레일러와 충돌해 42세 한창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선언, 한·미간 긴장이 고조됐을 때여서 사고에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를 소재로 한 소설이 96년에 나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다.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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