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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말로는 못다한 내면의 고백,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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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말로는 못다한 내면의 고백, 편지

입력
199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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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진실의 기록, 편지연애편지,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열림원 발행, 9,000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 6,000원

황동규가 시 「즐거운 편지」를 발표한 덕에 꽤 오랫동안 편지쓰기는 더욱 가슴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 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 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이 시를 연애편지의 끄트머리에 값싼 만년필로 적어 나가면서 괜스레 비통함에 젖어든 연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애절한 사연이야 있든 없든 이런 편지를 쓰면서 너나없이 사랑의 몸살을 앓았다.

편지는 일기 다음으로 가장 사사로운 기록이다. 연애편지에는 청춘의 들뜬 열정과 감추고 싶은 아픔이 배어있다. 부모와 자식끼리, 형제 사이에 주고 받는 편지에는 따뜻한 가족애와 보살핌의 흔적이 묻어난다. 허례와 가식의 빗장이 계엄 해제된 공간, 진지함만 가득 살아 숨쉬는 편지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내밀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현대 여성운동의 대모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사랑했던 미국 소설가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연애편지」(이정순 옮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이재황 옮김)가 잇따라 출간됐다. 보부아르의 편지에는 지성인이자 한 여성으로서의 열정적인 사랑의 행로를, 카프카의 글에서는 그의 소설이 구축한 미로를 푸는 실마리를 읽어낼 수 있다.

실존주의가 세계를 풍미하던 47년, 계약 결혼을 한 사르트르와 함께 미국으로 강연여행을 떠난 당시 39세의 보부아르는 시카고에서 미국 소설가 넬슨 앨그렌을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앨그렌은 49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마약중독자, 창녀, 살인자, 죄수 등과 어울리며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한 독특한 작가. 만난 지 세 달 남짓만에 미국을 여행하는 비행기 속에서 보부아르는 「비행기의 둥근 창에 이마를 대고서 푸른 바다 위에서 울었어요. 그러나 부드러운 눈물, 사랑의, 우리 사랑의 눈물이었지요.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한 살 연하의 앨그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띄웠다.

보부아르가 64년 자신의 회고록 「사물의 힘」을 내면서 앨그렌과의 관계에 대해 쓴 글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파국을 맞을 때까지 두 사람은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연애편지」는 이 가운데 보부아르가 앨그렌에게 보낸 편지 304통을 묶었다. 연인에 대한 감미롭고 뜨거운 사랑, 보부아르의 독서 편력과 여행에 대한 열망, 사르트르와의 관계, 당시 파리 지식인들의 삶 등이 담겨 있다.

보부아르의 연애편지가 실존주의와 여권운동의 여전사의 모습보다는 감미롭고 관능적인 사랑 고백이 적지 않은 데 비해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띄운 편지는 무겁고도 심각하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제목만으로도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한다. 역시 이 편지는 카프카가 36세(1919년)에 아버지 헤르만에게 썼다가 결국 부치지 않고 서랍 속에 넣고만, 아버지에 대한 장문의 탄핵이다.

카프카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추억한다.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법과 질서와 규율을 존중하는 전형적인 가부장. 실리와 이기를 따지며 가족 앞에서 또 아들이었던 카프카 위에 왕처럼 군림했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을 닮기를 바랐다. 하지만 카프카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했으며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다.

죄의식과 자기혐오에 시달린 카프카는 하지만 영화 「파드레 파드로네」에서처럼 아버지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파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대신 글쓰기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비판과 거부의 마음을 그의 이름난 소설들에 녹여냈다. 「저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습니다.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다 대고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습니다」. 번역자 이재황씨는 『소설 「소송」의 요제프나 「성」의 측량사는 「법」과 「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부단히 접근해가려고 노력한다』며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개인을 맹목으로 지배하는 거대한 사회 메커니즘의 상징적 형상이라 할 수 있고 그런 공허한 목표를 향한 노력은 필연으로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저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을거예요. 시카고의 슬픈 거리에서 지상으로 가는 지하철 철교 아래에서, 고독한 방안에서 저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는 사랑스러운 아내처럼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우리는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꿈이 아니니까요. (앨그렌을 만난 몇 달 뒤 사랑의 고백, 19쪽)

■사르트르와 저는 아주 빨리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요. 그는 제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첫번째 남자였고 그 전에는 아무도 저에게 키스조차 하지 않았어요. …성적으로 완벽한 성공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원인이었어요. …젊고 잘 생긴 보스트가…저보다 훨씬 젊은 그는 사르트르의 학생이었고 사르트르를 몹시 좋아하고 있었어요. …알프스 산맥에서 도보여행을 하는 중에 같은 텐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보스트와 저는 함께 자고 싶은 갈망을 느꼈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게 없었어요. (앨그렌을 만난 1년 반만에 지난 사랑을 털어놓으며, 310쪽)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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