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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40)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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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 쓴다](40) 광주민주화운동

입력
199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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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항쟁은 박정희 사후 군부 권위주의의 복원을 시도하던 신군부에 정면으로 대항한 광주시민들의 10일간의 외로운 민주화 투쟁이었다. 열흘간의 투쟁은 (1)5월18~21일 특전부대에 의한 무차별 살상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목숨을 건 저항 (2)22~25일 국가권력이 패퇴한 상황에서의 대동적 시민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3)26일 오후~27일 새벽까지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과 시민군의 자기희생이라는 뚜렷이 구분되는 세 국면의 연속이었다.거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광주항쟁은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한 돌출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60년대이래 박정희 정권이 추진해온 민중배제적 자본주의 발전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모순, 그리고 70년대 유신체제의 폭압적 지배구조가 심화시킨 「독재 대(對) 반독재」의 사회정치적 균열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민중수탈적 경제와 폭압적 권위주의체제는 79년에 들어서면서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피살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와중에 군부권위주의의 부활을 시도하는 신군부의 등장은 문자 그대로 「역사반동적」인 것이었다.

당시 광주지역은 박정희 정권이 창출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중앙에 위치하고있었다. 박정권의 지역편향적인 경제개발정책은 호남인의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심화시켰고, 호남인의 정치경제적 불만은 그간 독재권력으로부터 탄압받아온 호남 출신의 정치가 김대중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투사되고 있었다. 당시 호남인은 김대중의 지지를 통해 지역소외와 사회모순이 극복되기를 열망했다. 이러한 열망은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통하여 김대중을 내란혐의로 구속하면서 분노로 변하였다. 김대중 구속으로 민주화와 소외극복의 대안을 잃는 지역주민들은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고, 이는 신군부 세력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수부대를 동원한 무차별적 살상은 광주시민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국가 폭력 앞에 인간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말도 안되는 상황』 전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광주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적 한계 상황이 투영된 집합적 서러움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것이었다.

비록 광주항쟁은 공간적으로 「고립된」 투쟁이었지만, 역사적으로 결코 「외로운」항쟁은 아니었다. 이미 유신체제 말기에서 발생한 부마항쟁에서 볼 수 있듯이, 광주항쟁은 군부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대중항쟁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당시 군부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그간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고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광주항쟁은 기존의 민주화운동과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다. 그것은 광주항쟁이 80년대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역사적 에너지원으로 작동하였고, 한국전쟁 이래 냉전 이데올로기의 일방적 지배로 척박했던 한국의 사회운동의 이념적 지평을 확대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으며, 전두환, 노태우를 사법적 심판대 앞에 내세움으로써 한국에서의 군부정치의 가능성을 완전히 폐쇄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광주항쟁은 우선 군부정치의 부당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항쟁은 엄청난 자기희생을 통해 군부의 폭력성과 모순성을 여지없이 보여줌으로써,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 12·12, 5·17, 그리고 5·18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의 신군부에 대한 용인적 태도는 젊은 지식층을 비롯한 민주화세력에게 「미국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게 했다. 즉 광주의 비극은 학생과 재야운동권에게 기존 체제가 유지되는 한 민주화와 사회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는 믿음과 「군부파쇼」체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신념을 강화시켰다. 또한 광주항쟁의 좌절은 7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화세력의 확대 및 조직화, 그리고 민주화 세력간의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등장한 새로운 인식은 단순히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추상적 구호에 머물지 않았다. 학생운동은 조직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념적으로 급진화 되었으며, 사회민주화투쟁과 반미운동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84년 「전국학생총연합」과 그 전위조직인 「삼민투」가 조직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84년 11월 민정당사를 그리고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항쟁 진상규명」,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공개사죄」,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철회」등을 요구하였다. 이들 학생조직은 86년에 「민민투」와 「자민투」로 대체되면서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군부독재에 저항하였다. 재야운동권 역시 급진적 이념과 전투적 행태를 띠기 시작했다. 이들은 70년대의 명망가중심의 개량주의적 민주화운동에서 탈피하여 민중세력의 성장과 집결을 추구하고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향한 사회변혁운동을 시도하였다.

광주항쟁은 새로운 저항이데올로기를 생성시키고 전파함으로써 다양한 시민사회 영역의 민주화운동을 조직화하고 행동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직접적 결과는 87년 6월항쟁으로 나타났다. 전두환 군부권위주의체제하에서 광주항쟁은 민주적 저항세력의 지평을 넓히고 그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범국민적 민주화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동시에 광주항쟁은 6월항쟁에 대한 군부엘리트 및 미국의 선택지를 제한함으로써 6·29선언이라는 민주화 개방을 가능케하였다.

광주항쟁은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살아남은 노태우 군부정권하에서도 어김없이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절차적 합법성을 갖춘 노태우 정권이라 하여 광주참사에 대한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었다. 광주유혈진압은 결코 씻을 수 없는 5공과 6공의 정치적 원죄였다. 노정권의 유화적 제스처(민화위의 설치 및 광주항쟁 사상자에 대한 보상제시)에도 불구하고, 광주청문회가 개최됐고, 이는 즉각적으로 군부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불러 일으켜 민주화 열기를 더욱 가속시켰다. 결과는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적 후견인인 전두환의 정치적 유배였으며, 노정권의 뿌리인 5공화국에 대한 부정이었다.

광주항쟁은 전두환을 유배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3당합당을 근간으로 탄생한 김영삼정권은 민간정권로서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할 목적으로 5·18이 문민정부 탄생의 모태가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5, 6공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하나회 핵심 군지휘관들을 숙정하고, 12·12와 5·17을 「쿠테타적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79, 80년의 정치적 변혁과정을 주도하였던 인사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원치 않았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심판론」은 95년 발생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국민적 비판에 직면하였고, 이로 인해 김영삼 대통령은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12·12와 5·18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심판을 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97년 4월 사법부는 최종적으로 12·12와 5·18을 각각 「군사반란」과 「내란」이었음을 판결하였고, 관련 인사들을 처벌하였다. 이로써 광주항쟁은 「성공한 쿠테타도 처벌된다」는 또 하나의 민주적 전례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결국 광주항쟁은 한국정치의 민주화 개방을 유도하였고, 또한 민주화이행 및 공고화과정에 있어서 최대 위협요소인 군부의 정치적 개입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견제 축소시켜 마침내 군부의 정치개입 공간을 완전히 폐쇄시켰고, 동시에 민간우위의 정치질서를 확보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80년 5월 신군부에 대항한 단순한 10일간의 항쟁이기보다는,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공고화 과정을 끊임없이 추동한 역사 실천적 동력원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어떻게 불려왔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의 노래」는 이렇게 5월 광주를 노래했었다. 19년이 흐른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80년 5월21일 이희성(李嬉性)계엄사령관은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 18일부터 연 4일째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발표하고, 이날 발표한 경고문을 통해 광주시민들에게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 인물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등을 통해 지역감정과 난동행위를 선동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군부는 「폭동」으로 규정했고, 언론은 「광주 사태」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다루었다. 물론 이때 언론은 계엄사의 일방적 발표만을 추종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5·18」이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기본 입장은 5공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다만 6공 정부의 노태우 대통령은 88년 4월 광주를 방문해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라는 「수사(修辭)」를 사용했으나, 역시 기본 시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물론 이때부터 학생운동권에서는 「광주 항쟁」이란 용어가 정착됐다. 90년 광주보상법이 제정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이 주어졌다. 95년에는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97년엔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김대중대통령은 지난 기념일에 「광주 의거」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정부기관마다 호칭에는 차이가 있어 「5·18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화운동」등의 용어가 혼용되고 있는 실정. 그러나 광주시민들이나 관련단체들은「광주」라는 지역적 한계를 탈피할 수 있도록 「민중항쟁」으로 명명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광주 망월동 5·18묘역의 명칭도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것의 하나. 망월동 묘역은 80년 5월 27일 진압 이후 신군부의 「학살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생겨났다. 광주시내에서 시신을 900여평 남짓한 야산에 집단 매장한 것. 81년 5월18일 첫 추모제가 열렸지만 삼엄한 경비 속에 유족들은 울음을 삼켜야 했다. 5공정권은 이장을 조건으로 위로금 1,000만원과 이장비 50만원을 제의, 26기가 망월동에서 빠져 나갔다. 97년 묘역이 새단장됐고, 이제는 민주화 성지의 상징으로 「5·18 묘역」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박은주 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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