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을 털어낸 대자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강렬하게 타올라 회색 겨울로 식어간다. 불 봉우리와 화염의 계곡. 장엄한 분신(焚身)의 의식이 시작됐다. 이달초 백두대간 설악산에서 채화된 단풍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북에서 남으로 산록을 타고 흘러내리다 다음달 중순 남도의 섬에서 불씨를 거둔다.올 단풍은 높은 산의 경우 예년보다 9~13일, 낮은 지역은 5~8일이 늦다. 단풍의 색깔을 구워내는 9월 상·중순의 평균기온이 평년보다 섭씨 2.7도 높았던데다 비와 구름 낀 하늘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가장 먼저 단풍이 드는 산은 설악산. 8일 대청봉 인근에서 시작돼 23일께 절정을 이룬다. 가장 늦은 단풍은 해남 두륜산등 호남의 해안지역으로 11월 10일께나 비롯돼 11월말까지 이어진다.
「첫 단풍」은 산 전체의 20%, 「절정」은 80%가 물이 들었을 때를 뜻한다. 첫 단풍은 주로 정상 부근에서만 볼 수 있어 체력 좋은 등산인들의 차지이고, 일반인이 중턱에서 단풍을 만끽하려면 절정기에 찾는 것이 좋다.
명산치고 단풍이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그 가을빛 때문에 「명산」의 칭호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금수강산으로 미리 떠난다./권오현 기자 koh@hk.co.kr
■설악산
6일 현재 정상 부근만 울긋불긋하다. 주말부터 산을 타고 급강하해 12일께는 희운각대피소까지 내려온뒤 23, 24일에는 설악동과 비선대 계곡에서도 편안하게 단풍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
마음 속까지 붉게 물들이려면 내·외설악을 관통하는 정상정복 산행과 봉우리를 잇는 능선산행이 제격이다. 백담계곡-수렴동-봉정암-대청봉(1,708㎙)-희운각-천불동계곡-비선대를 잇는 30여㎞의 코스가 일반적인 정상정복 코스. 쉬지 않고 주파하면 14시간이 걸린다.
그중 천불동계곡은 설악 단풍의 으뜸 경관으로 꼽힌다. 비선대에서 희운각에 이르는 이 계곡에는 귀면암, 오련폭포, 천당폭포등 설악비경의 열 손가락안에 꼽히는 명소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하얀 바위를 타고 내리는 옥색 물줄기와 그 위를 뒤덮은 오색의 단풍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평소에는 3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코스이지만 곳곳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
능선산행의 백미는 희운각과 마등령을 연결하는 공룡능선. 오르락 내리락 5시간이 걸리는 힘든 산행이지만 하늘을 찌르는 기암 봉우리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색을 피워내는 단풍등 신비로운 체험이 기다린다. 내설악에서는 백담사까지 시멘트로 포장돼 운치가 다소 바랜 백담계곡과 이웃 십이선녀탕계곡도 뻬어난 단풍을 자랑한다. 설악산 관리사무소 (0392-636-7700,2·강원 속초시)
■지리산
1,500㎙가 넘는 봉우리가 15개이고 둘레만 800리에 이르는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1,915㎙)을 중심으로 사방 부채살처럼 패인 수많은 골짜기가 단풍의 바다에 잠긴다. 시기는 이달 중순(17일께)부터 말(27일)까지.
지리산 피아골은 어쩐지 「붉다」는 선입견이 드는 지명. 논에 많이 나는 잡초인 피가 많이 자라 피밭골로 불리던 것이 피아골이 됐다. 가을이면 피아골은 실제로 붉다. 「피아골 단풍」은 지리산 10경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선유소, 연주담, 통일소, 비룡계곡, 상제탑, 삼홍소, 잠용소등 골을 따라 연이은 물웅덩이와 암석이 선계의 풍광을 자아낸다. 연곡사에서 출발하면 직전마을, 피아골을 거쳐 노고단에 이르게 되는데 4시간 정도의 산행이면 단풍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칠선계곡도 만만치 않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서 천왕봉에 곧바로 오르는 칠선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3대 계곡으로 꼽히는 곳. 18㎞에 가까운 계곡이 단풍으로 가득하다. 가도가도 끝없는 오색 등산길. 색깔에 지쳐버릴 지경이다. 지리산은 고도 때문에 정상과 능선의 온도차가 섭씨 10~15도에 이른다. 단풍철 꼭대기에 눈이 내리면 난·온·한대의 산록을 감상할 수도 있다. 지리산관리사무소(0596-972-7771·경남 산청군), 북부관리사무소(0671-625-8911·전북 남원군), 남부관리사무소(0664-783-9100·전남 구례군).
■내장산
예로부터 춘변산 추내장(春邊山 秋內藏)이라 했다. 봄이면 변산(전북 부안군)의 신록이 으뜸이요, 가을에는 내장산 단풍이 최고라는 이야기이다. 내장산은 호리병을 뉘어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입구가 좁고 기슭이 넓은 산세를 가진 산은 대체로 단풍이 곱다. 강원도의 오대산과 가칠봉 그리고 내장산이 그 예에 속한다. 특히 내장산의 단풍나무는 그 잎이 작고 얇다. 앙증맞으면서도 투명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올해에는 10월29일부터 11월8일께까지 그 고운 자태를 볼 수 있다.
내장산의 장점은 해발 763㎙의 얕은 산이기 때문에 오르기가 쉽다는 것. 등산 출발지점인 내장사 일주문에서 주봉인 신선봉까지 가장 가까운 금선계곡 코스를 타면 2시간 40분이면 오른다. 때문에 단풍철이면 사람들로 바다를 이룬다. 내장사 경내로 들어가는 500여㎙의 단풍길만으로도 수많은 관광버스를 불러들인다. 골수 등산인들이 애써 이때를 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에는 특히 연자봉에 오르는 케이블카가 개통돼 인파가 더 할 것으로 전망된다.
단풍을 돌아보는 등산코스는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까치봉을 돌아 신선봉에 오르는 것. 오르는 데 3시간 30분, 하산할 때 금선계곡을 타면 2시간 정도가 걸린다. 금선계곡의 맑은 물 위로 가을의 잔해가 떠내려 가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그윽하다. 관리사무소(0681-538-7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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