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미 7기갑연대가 미국 건국 초기의 인디언 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던 커스터 장군의 「제7기병대」 후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AP통신은 최근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당시 발포 명령을 수행한 주역으로 7기갑연대(7th Cavalry Regiment)를 지목했다. 이 부대는 미국의 서부개척사에서 인디언 토벌에 앞장섰던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이 이끌었던 「제7기병대」(7th Cavalry Regiment)의 후신. 비록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하필이면 학살의 총대를 맸던 부대가 100년전 인디언 소탕에 앞장섰던 전통을 이어온 커스터의 후예라는 점이 주목을 끌고 있다.커스터는 인디언 소탕작전의 주역으로 인디언에게는 「학살자」에 다름아니었지만 할리우드의 정통 서부영화에서는 주로 「영웅」으로 묘사되는 인물. 이때문에 지금도 7기갑연대 인터넷 웹사이트에는 커스터와 그가 이끈 제7기병대 이야기가 잔뜩 소개돼 있다.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커스터는 남북전쟁에서의 공이 인정돼 의용군의 장군(소장) 칭호를 받기도 했으며 남북전쟁후 제7기병대 중령으로 발탁된뒤 1875년 블랙힐스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인디언 토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이어 이듬해 「리틀 빅 혼」전투에서 수 족과 사이언 족 연합군과 맞서 싸우다 264명의 부하 전원과 함께 전사했다.
이같은 전통을 가진 7기갑연대는 이후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초 쿠바와 필리핀, 멕시코등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때는 곳곳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는 동안 몇차례 부대 재배치를 거친 7기갑연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50년7월22일 제1기갑사단 예하로 부산에 상륙, 3일뒤 곧바로 최전방 방어선에 투입된다. 이때 7기갑연대가 투입된 곳이 바로 노근리 부근. 당시 이 부대는 5기갑연대, 25보병사단등과 함께 충북 영동과 황간 일대에서 방어선을 구축,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인터넷 웹사이트에는 AP통신이 보도한 당시의 학살사건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이처럼 처음부터 최전선에 투입된 7기갑연대는 인천상륙작전 후에도 최초로 평양을 탈환하는 등 한국전쟁 내내 선봉대 역할을 했으며 그에 따른 희생도 적지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한미군 관계자에 따르면 전후 1기갑사단은 모두 철수했지만 7기갑연대 소속의 1개 수색대대는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부대 마크에 있는 「게리 오웬」이란 말은 이 부대의 애칭이자 부대가(歌). 이는 원래 아일랜드 전통 행진곡으로 커스터가 7기병대 군가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81년에는 1기갑사단의 공식 부대가(歌)가 됐다.
홍윤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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