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2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등 변혁의 시대였던 만큼 가톨릭의 본산인 바티칸도 큰 변화를 경험했다.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를 포함, 금세기에 재위한 9명의 교황도 이같은 격변에 맞서 고민하며 역사의 발자취를 남겼다.1900년이 시작될때 교황은 90세였던 레오 13세였다. 1903년까지 25년을 재임했던 레오 13세는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 스페인과 독일의 분쟁을 조정하고 오토 비스마르크 독일총리를 설득해 반가톨릭법을 막았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기계에 매몰돼 가던 노동자의 임금과 조합설립권을 옹호, 「노동자 교황」으로 불렸다. 비오 11세는 1929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 면적 108 에이커의 바티칸 공확국을 세웠다.
베네딕토 15세와 비오 12세는 재임기간중 각각 1,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베네딕트 15세는 전쟁중 중립을 선언하면서도 독가스와 같은 반인간적인 무기를 강력히 반대했다. 비오 12세도 2차세계대전중 나치의 압박을 피해 로마로 들어온 유태인을 숨겨주고 교회의 금주발을 녹여 그들을 도왔다. 그는 나치즘을 「악마의 유령」이라고 비난했다.
요한 23세는 교회의 관료주의 철폐를 철폐하고 개신교와의 화해에 힘을 쏟았다. 냉전체제속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보다는 『무책임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만큼 위협적인 것』이라며 중립적 입장을 견지했다.
바오로 6세는 추기경 숫자를 87명에서 137명으로 늘려 신흥 독립국가에 할당함으로써 가톨릭의 국제화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 각국을 방문하다 마닐라에서는 암살의 위기를 맞기도 했던 바오로 6세는 교회회의에 여성 성직자를 옵서버로 참석시키고 테레사 수녀에게 성녀의 지위를 부여하는등 여권신장에 기여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낙태를 금지했는데도 불구, 가톨릭 국가들이 이를 따르지않아 권위가 손상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재위기간 33일의 20세기 최단임 교황. 부검이 이루어지지않아 그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등 각종 루머가 끊이지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비(非)이탈리아인으로서는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이후 455년만에 처음으로 교황에 올랐다. 역대 교황이 전통적으로 교권수호에 전념해온데 반해 국제질서에 적극 개입,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공산치하를 경험한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에 반대했고 미국의 동유럽 반정부 세력에 대한 자금유입등을 묵인, 동구 붕괴에 일조했다. 종교적으로는 종파와 교파를 초월, 이슬람을 인정하고 개신교·정교회·성공회등과의 화해에 앞장섰다. 제트 전용기로 보스니아에서 알래스카등 곳곳을 누벼 현재까지 방문국수가 118개국에 이르며 한국도 2차례 들렀다. 파킨슨씨병과 싸우고 있는 그는 2000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다.
권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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