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없는 일상의 하루 하루들은 우리를 죽이는 자다. 나는 예술을 통해 삶이 다른 것이 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어본다. 일탈의 상상력이라 할 만한 이런 움직임들은 때로 기괴한 전경을 낳기도 하고 때로 도착된 현실만을 씁쓸히 확인시키기도 한다. 내가 다른 것이 되고 싶다는 심리의 바닥에는 조악한 현실을 수긍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가 숨어 있다.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최승호의 시집 「그로테스크」에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많은 놀라운 풍속들이 전시되어 있다. 풍속? 다소 오해할 수 있는 이 단어를 굳이 쓰는 것은 이 시인의 다른 시집에서처럼 시인의 목소리가 엄격히 절제되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시인의 이런 즉물적 사물 묘사는 이미 그 나름으로 일가를 이룬 느낌이다. 그러나 이 새 시집에서는 뭔가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반갑다.
그 목소리를 나는 발터 벤야민이 「트임」이라 불렀던, 일상적 비전의 제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시한폭탄을 탑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테스크」의 시인은 이미 삶 속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삶을 꿈꾸는 화자의 지향을, 글 노동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빌려 잘 그려놓고 있다. 그것은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다는 토로이면서 동시에 「보도블럭으로 세계가 뒤덮이는 것」(「구토물을 먹는 아침」 가운데)에 대한 작은 저항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삶의 체취들이 진한 그의 시편들에서 묻어나오는 이런 진솔한 음성을 발견한 것은 내게 시인의 예사롭지 않은 변모를 예감케 한다. 왜 우리는 영화 「트루먼 쇼」를 보면서 관리되는 사회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휴대폰으로 중계하는 행동(「메시지」)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 시인은 거듭 묻고 있다./정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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