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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한순간](27)이생진 '외로은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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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한순간](27)이생진 '외로은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입력
1999.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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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징검다리는 땅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이어지지만 섬의 징검다리는 땅에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섬을 끝섬 또는 말도(末島)라고 하다. 추자군도의 횡간도가 이에 속하고, 고군산 열도의 말도가 이에 해당한다. 횡간도는 그런 조건만으로 외로움에 지친 섬이다.그런데 이 섬에서 평생을 산 노인이 있다. 70이 넘은 서씨 노인이다. 이 섬에서 태어나 이 섬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이 섬에서 장가들어 조그마한 배를 부리며 고기 잡고 황무지를 일궈 보리와 감자를 심으며 자랐다. 지금은 자녀들이 다 육지로 나가고 두 늙은이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섬의 쓸쓸한 모습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어렸을 때 다니던 학교는 폐쇄됐고 손발이 닳도록 일궈낸 보리밭과 감자밭은 가꿀 사람이 없어 잡초가 무성했다. 돌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이웃들이 떠난 빈 집엔 검은 고양이가 가을밤을 지키고 있다.

서씨는 귀한 손님이 왔는데 보여줄 것이 없다며 어려서 소풍갔던 곳으로 날 데리고 갔다. 풀이 우거진 운동장을 지나 보리밭과 메밀밭 그리고 칡넝쿨이 얽힌 소나무 숲 속을 뚫고 등대가 보이는 큰 바위로 올라갔다. 학교에서 불과 400∼500m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길이 험해서 한참 걸어온 것 같았다. 그는 바윗돌에 앉아서 등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그때 선생님은 저 등대를 보고 놀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등대가 커 보이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이 곳으로 소풍온 친구는 모두 여덟 명, 지금 그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하추자도에 한 사람 그리고 횡간도의 자기 자신, 단 둘이 남아있다. 하추자도의 친구도 사오년 전에 한 번 만났을 뿐 그 후로는 소식이 없다. 지금은 이 땅에 자기 혼자만 살아남은 것 같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는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어린애처럼 친구 생각이 나면 등대가 보고 싶다고.

그는 자기가 다니던 분교가 문을 닫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지금은 조상의 무덤 옆에 자기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놓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 돌아올 적에는 저 등대가 자기 집 방에 켜놓은 등불처럼 반가웠는데 지금은 등대를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때 친구들이 생각나고 그때 선생님이 생각나고 소풍에서 돌아와서 등대에 관한 글을 써오라던 숙제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등대란 뱃길을 밝혀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서씨가 배를 타지 않는 지금 등대는 서씨의 추억을 밝혀주고 있다. 서씨는 그 등대 앞에서 어려서 쓰지 못한 시를 지금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등대 이야기를 시집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작가정신 발행)에 담았다. 「등대가 묻는다/ "시 쓰러 왔니? 자살하러 왔니?"/ 나는 머리를 두 번 끄덕였다」(「등대가 물었다」 전문).

이생진은 섬시인이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서울 보성중 교사를 지낸 그는 바다와 섬, 인생과 고독을 잇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 「거문도」 「하늘에 있는 섬」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섬에 오는 이유 」 「내 울음은 노래가 아니다」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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