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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타임스] "노근리사건 오판등 복합적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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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타임스] "노근리사건 오판등 복합적인 결과"

입력
1999.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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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은 당시 미 지도자들의 정보 무지와 군수뇌부의 오판, 미숙한 병사들의 공포와혼란, 한국민에 대한 인식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3일 미 참전군인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이 신문은 미 국민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노근리사건의 법적.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느냐라면서 그 해답은 한국전쟁을 연구해온 역사가들과 참전군인들이 밝힌 크고 작은 사실 안에 있다고 전했다.

다음은 LA 타임스가 보도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정보수집 미흡= 한국전 발발 당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등 당시 미 지도자들이 한반도 위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무지했으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등미 사령관들은 북한군 남침을 쉽게 격퇴시킬 수 있을 것으로 장담, 훈련을 제대로받지 못한 신병들이 대거 투입됐다.

역사가들은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장군이 북한군을 단번에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자만했으며 남한에 파병된 병사들은 길어야 90일 안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을것으로 믿었다고 지적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국지적 군사행동'이나 `치안활동'(police action)으로 불렀다.

그러나 미 지도자와 군 수뇌부의 발언이 시사한 것과는 달리 당시 북한군은 세계에서 가장 무장이 잘 돼 있고 군기가 확립돼 있으며 전투훈련을 잘받은 군대였다.

반면 남한에 파병된 맥아더 병력은 그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군대와는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인종차별= 인종차별주의도 미군의 노근리주민 학살에 일정 역할을 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한국민과 다른 비백인계에 대한 계몽이 미흡했다.

노근리사건을 인종살해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유색인종, 특히 한국민에 대한 백인사병들의 생각이 학살 지시 결정에 작용한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전쟁전문가인 시카고대학의 브루스 커밍스교수는 "트루먼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백인 미군병사들은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이었으며 유색인종을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뉴욕을 비롯한 미 12개주는 백인과 결혼이 금지된 유색인종에 한국민을 포함시켰으며 뉴욕주 일부에서는 유색인종은 물건을 살 수 없었다.

인종 차이는 한편으론 미군이 한국민 가운데 피아를 구별하는 데 큰 어려움을초래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적군(일본군)을 쉽게 인지할 수 있었고 민간인 출신의전투원은 드물었다.

▲공포.명령복종= 사병들은 명령에 복종해야 했고 예견할 수 없는 전장에서의공포와 혼란이 주민학살을 부채질했다.

당시 기관총 사수였던 에드워드 데일리(68.테네시주 클락스빌거주)는 당시 미군상황을 "혼란과 무질서"로 요약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사병들은 죽는 것이 무서웠다. 실제 죽음에 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존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병들을 보호해만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군대에 들어오면 엄격한 규율에 길들여진다. 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명령은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으로는 (학살)명령을 하달했던 오마르 히처 소령도 50년대초전사했다고 덧붙였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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