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라면 그럴 성 싶기도 하다. 구두수선공은 상대의 구두를 보고 그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고, 애주가는 상대의 안사람이 내놓는 와인을 보고 그 집안의 품격을 알아본다더니 나는 상대가 구사하는 말을 보고 그 됨됨이를 가늠하게 된다. 우리말과 우리 문학을 가르치다보니 생긴 직업병이 아닐까.우리 주변의 각종 명칭들, 언론에 인용되는 유력 인사의 말, 각종 기관의 대변인 성명이나 논평, 방송에서 사용하는 어휘 등을 보면 섬세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너무 많다. 스스로 살펴서 좌회전을 해야 한다는 도로 표지임에도 「비보호」라고 하고, 과속으로 많은 인명을 잃으면서도 굳이 「고속도로」라는 명칭을 고집한다.
「아」다르고 「어」다른 법이며, 말이 씨가 되기도 하는 법임을 유념할 일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무위원」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전 당원이 당무의 주체여야 바람직한 것인데, 당무위원이 따로 있으니 그 밖의 사람들이야 하릴없이 겉돌 수밖에 없다.
「실업대책」이라는 말도 좀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서라면 「고용창출대책」이라고 해야 옳다.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을 「출전 준비」 운운해서는 안되며, 선거비용을 구태의연하게 「총알」 운운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선거가 국민적인 축제여야지 「전쟁」이여서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라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을 고집하는 한 고교 교육의 정상화는 그만큼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 같은 시험을 두고도 「졸업시험」이라는 말에 상응하는 명칭을 찾아보자. 그것에 임하는 자세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최근에 한 신진 유력 인사가 「국민」을 「소비자」에, 「당」을 상품에 비유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정치적 어휘들을 경제적 어휘들로 번역하는 것을 통해 현 정치권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정치에 경제적 마인드를 불어넣고자 하는 시도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신선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없지 않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정보화사회이자 문화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국민을 소비자보다는 네티즌 혹은 관객에, 정당을 상품보다는 홈 페이지 혹은 작품에 비유하는 그런 참신한 마인드는 없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새롭게 수혈될 새 피에서 그런 참신한 마인드를 원한다. 21세기를 살아갈 신세대들은, 승전의 전리품은 두말할 것도 없겠고, 이득을 주는 상품보다는 감동을 주는 작품을 원한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하희정·서울대 인문대 강사·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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