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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생존자 양해찬씨] 아비규환속 수백명 목숨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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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생존자 양해찬씨] 아비규환속 수백명 목숨잃어

입력
199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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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해찬(梁海燦·59·충북 영동군 영동읍 임계리)씨. 49년전으로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며 치를 떨었다.전쟁 발발 한달뒤인 1950년 7월26일. 미군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피란길로 내몰았다. 당시 열살이었던 양씨도 가족, 친척과 함께 4번국도를 따라 수백명의 피란민 행렬에 끼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다 황간읍 노근리에 다달았을 때였다.

미군들이 탱크로 길을 막으며 왼쪽 언덕에 있는 경부선 철길로 피란민들을 올려보냈고 잠시후 「쌕쌕이」(미군 전투기) 1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어 살떨리는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쌕쌕이는 나무밑 등에서 주먹밥 등으로 점심을 먹던 주민들에게 무차별로 포탄을 투하했고 기관포도 불을 뿜었다. 『미군이 미리 매복해 있었는지 철길 좌우 산속에서도 총알이 쉴새없이 날아왔습니다. 아비규환속에 수백명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살아남은 100여명의 주민이 철로 밑 쌍굴로 대피했으나 이곳에서 2차 학살이 벌어졌다. 미리 있던 미군의 총격에 또다시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굴속에서 쥐죽은 듯이 엎어져 핏물로 목을 축이며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바로 굴 입구에 있는 샘물을 먹으러 굴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모두 총탄에 희생됐습니다』

4일후 미군들이 사라지고 굴 밖으로 나온 양씨 옆에는 부모님과 누나만이 남아 있었다. 피란길을 함께 했던 할머니와 형, 동생, 고모, 고모부, 고종사촌동생 등 6명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양씨는 이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97년 영동군의원 시절 노근리 학살사건 조사특위 위원장을 맡기도 한 양씨는 지금도 국내와 미국 각계에 조사보고서와 탄원서를 보내며 정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만이 자신의 가족을 비롯, 당시 희생된 주민들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동=전성우기자 swch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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