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된 충북 영동군 노근리 경부선 철도 밑 굴다리(노근터널).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관총 난사자국이 터널 벽면에 선연히 남아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휑하니 뚫린 비좁은 공간에서 피란민들이 당시 얼마나 처절한 참상을 겪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1950년 7월25일 영동군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에 지프를 타고 나타난 2명의 미군과 한국경찰관 1명은 주민들에게 급히 짐을 꾸릴 것을 지시했다.
500여명의 주민은 『인민군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대구와 부산으로 피신시켜 주겠다』는 미군의 말을 믿고 그들의 인솔하에 서울_부산 국도를 따라 도보로 피란길에 올랐다.
생존자인 양해찬(梁海燦·59)씨는 『25일 밤 하기리 근처에 이르렀을 때 미군들은 주민들을 거칠게 길 아래로 끌어내리며 숙영할 것을 명령했다』며 『심상치 않은 미군의 태도에 겁에 질린 주민들은 뜬눈으로 날밤을 샜지만 다음날 미군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전했다.
26일 아침 인솔자를 잃은 주민들은 스스로 피란길에 올랐다. 미군이 다시 나타난 것은 이날 정오께. 노근리 철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4,5명의 미군이 피란행렬을 막아서면서 어디론가 무전을 하더군요. 미군들이 긴급히 철수하더니 곧바로 미군전투기가 날아와 기관총을 쏴댔습니다. 현장은 바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습니다』
공중에서의 기총소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길 양쪽에서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피란민중 상당수가 그대로 철로위에 쓰러졌다. 양씨는 『나머지 주민은 미군의 위협속에 철도 밑 굴다리로 대피했다』며 『곧이어 굴다리 양쪽 입구에서 또다시 기총소사가 시작됐다』고 끔찍했던 순간을 되새겼다.
미군들은 굴다리 인근 야산에 기관단총을 걸어놓고 터널 안쪽은 물론이고 대피하기 위해 뛰쳐나온 피란민들에게 무차별로 총탄을 퍼부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들은 굴다리와 근처 수로(水路)에 몸을 숨긴 채 지냈다. 양씨는 『간간이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시신을 뒤집어쓰고 피가 섞여 굴다리 안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을 유일한 식량으로 삼으며 버텼다』고 증언했다.
양씨는 또 『몇명 안되는 생존자 중 일부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굴다리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곧바로 사살됐다』고 전했다.
29일 미군이 인민군에 밀려 퇴각한 뒤 주민들은 비로소 굴다리를 나올 수 있었지만 피란길에 올랐던 500여명의 생존자 중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다.
『왜 미군이 우리를 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이렇게 엄연한 증거가 남아있는데 미국도, 우리정부도 나몰라라 하는 태도에 분노를 느낍니다』
양씨는 『더군다나 얼마전 대전지방철도청이 굴다리보수공사를 명목으로 대부분의 총탄자국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며 『학살의 증거를 없애려는 행위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며 분개했다.
이주훈기자 ju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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