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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38)중화학공업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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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38)중화학공업 정책

입력
1999.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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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공업국 도약위한 승부수70년대 후반기는 한국경제의 전환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때 새로운 경제정책으로 등장한 것이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이다. 70년대 후반기는 제3차 5개년계획(72-76)이 마무리되고 제4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기간이었다. 제3차 5개년계획까지 한국 경제는 정부의 지속적인 수출지향 정책에 힘입어 목표 성장률을 초과하는 결실을 보았다.

성장의 원동력은 물론 수출이었고, 수출품의 주종은 노동집약적인 상품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정부와 재계는 노동집약적 상품 수출로는 더이상 고도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경공업 주도형 수출전략은 도전에 부닥쳤다. 나라 안에서는 노동 수요가 늘어나면서 임금상승 압력이 현저히 커졌고, 밖으로는 말레이시아 태국 등 후발 개도국의 추격에 직면했다. 거기다 74·75년의 세계적인 석유파동으로 원자재를 수입·가공해서 수출하는 방식의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그러한 국내외 상황에 대처하고 자주국방과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하려는 정부의 의지는 이미 73년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드러난 바 있었다. 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80년대 우리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과 국민복지에 관한 정책을 제시하면서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중심을 두는「중화학공업 시대」를 선언했다.

주요 내용은 첫째,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선진국이 될 수 없으므로 전국민이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국방력의 급속한 증대를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80년대 초에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하며, 전체 상품 중 중화학제품이 50%를 훨씬 넘게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중화학 부문의 생산 능력 확대였다.

80년대 초까지 조선 능력은 25만 톤에서 약 500만 톤으로, 정유시설은 하루 39만 배럴에서 약 94만 배럴로, 석유화학 원료가 되는 에틸렌 생산은 10만 톤에서 80만 톤으로, 전력은 380만 ㎾에서 1,000만 ㎾로, 시멘트는 800만 톤에서 1,600만 톤으로, 자동차는 연간 3만 대에서 약 50만 대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었다. 넷째, 이러한 대규모 공장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동ㆍ서·남해안 지방에 국제 규모의 대단위 공업단지 또는 기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산업 구조를 인위적으로 앞당겨 고도화하려는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제4차 5개년계획(77~81)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개별 산업 육성법」등을 제정하고,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으로 산업 구조 개편을 실시했다. 지원방법도 매우 다양했다. 우선 전략산업으로 주요 중화학공업을 선정하고 이들 산업에 내국세와 관세 감면, 금융지원, 수입 규제에 의한 국내 판매가격 보조, 기타 행정지원 등을 해주었다.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화학 등 거의 대부분의 중화학공업이 전략산업으로 지정됐다.

73년 7월 완공된 103만 톤 규모의 포항종합제철을 2,3,4기 확장을 통해 더욱 규모를 확장했다. 비철금속공업 분야에서는 온산 공업단지에 아연제련소와 구리제련소를 완공했다. 석유화학공업에서는 기존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시설 능력을 확장하고, 여천에 제2 석유화학단지를 신설했다.

조선공업에서는 현대 울산조선소, 대우 옥포조선소, 그리고 삼성 죽도조선소를 건설했다. 기계공업에서는 기계류와 플랜트의 국산화, 기계류공업의 수출 주력 산업화, 방위산업의 모체 육성 등을 위하여 창원에 대규모 기계단지를 건설했다. 전자공업 분야에서는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을 중점 육성하고 최첨단 기술의 전자기기를 생산하고자 구미에 전자공업 제1,2,3단지를 건설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의 공업구조는 76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54.1% 대 45.9%이던 것이 79년엔 47.7% 대 52.3%으로 중화학 우위를 나타내었다. 한국 경제는 61년도 국민총생산에서 농림ㆍ어업의 1차산업 비중이 40% 이상이었고, 제조업 등 2차산업의 비중은 불과 15.2%의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80년에는 1차산업의 비중이 14.4%로 급격히 떨어지고 2차산업의 비중은 30.2%, 사회간접자본은 18.1%를 차지, 광공업은 61년의 2배로, 사회간접자본은 3배 이상 급상승했다. 60년대 전통적 농업국가에서 80년대에는 신흥 공업국으로 변모하게 됐다.

한국의 공업 발전 단계를 고려할 때, 중화학공업 건설은 추진 과정과 방법에서 힘에 겨운 무리한 정책이었다. 정부 주도로 계획되고 지나친 보호 속에 추진되어 방대한 정책금융과 집중적인 재정투·융자로 자원 배분의 왜곡 등을 가져왔다.

중화학공업의 업종 선정에서 장기적 비교우위보다는 편향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됐으며, 중화학의 생산 과정이 조립산업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력을 어느 정도 갖춘 부품산업의 기반 없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또 세계 경제가 석유파동으로 장기불황 국면에 놓여 있어서 선진공업국들은 감량과 합리화 경영을 추구할 때 우리는 세계 경기에 역행하는 확대정책으로 일관하여 공장이 완공된 뒤 낮은 가동률을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중화학건설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잉태하기도 했다. 만성적 인플레 경제 체질을 더욱 구조화시켰으며, 특정산업에 편중된 지원과 과보호는 비능률을 낳았다. 과잉 중복투자는 세계 경기의 침체로 부실화를 초래, 마침내 80년대 이후 「산업구조 조정」이라는 과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또대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 산업조직을 유발하여, 기술 기반의 취약과 부품산업의 저개발로 수입유발적 산업구조를 심화시키기도 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70년대 후반의 중화학공업화 시책은 세차례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수행으로 자신감을 얻은 당시 정부 관료와 기업가들이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다소 무리한 정책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산업구조 고도화의 바탕을 마련했고, 한국 경제 성장의 분수령이 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북한 경제력에 대한 열등감을 완전히 씻어내고 남북한 경제력의 역전을 몰고 온 시책이라고 평가한다. 중화학공업화 시책은 한마디로 공업화 시동기에서 성숙기로 넘어가기 위한 성공적인 승부수였다고 볼 수 있다. /유광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자주국방위해 중화학공업 육성

중화학공업시대 선언의 숨은 동기는 자주국방이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75)은 회고록 「한국 경제 정책 30년사」에서 방위산업 육성이 중화학공업화의 일환으로 추진됐으며 그 과정에서 외교 마찰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불안했다. 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습격사건에 이어 미군 정찰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고 11월 울진 삼척에 공비가 침투했다. 70년 2월 닉슨독트린이 발표됐다.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인이 하라, 미국은 빠지겠다」는 내용이었다. 닉슨독트린은 한국이 방위산업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7월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소구경 화기를 생산할 공장 건설을 지시했다. 72년부터 중구경 화기 등 기초 화기의 시제품 생산이 시작됐지만, 제품이 신통찮았다. 병기생산에 필요한 초정밀기술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행착오 끝에 방위산업 건설은 중화학공업 기반이 있어야 가능함을 절감, 73년 중화학 공업화 선언이 나온 것이다.

74년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됐다. 77년 3월 카터 미 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 계획을 발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80년 말까지 핵은 물론, 전투기·고도 전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의 국산화·양산화하고 중화학공업화 계획을 80년까지, 늦어도 81년까지 완수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은 73년 「군병기 장비 물자에 관한 기술자료 교환 부록」에 합의하고도 75년까지 기술 이전을 안해줬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는 판단에 영국 서독 스위스 프랑스 등과 장갑차, 포, 미사일 등 병기 도입과 기술제휴가 진행됐다. 미국 측은 이에 불만을 표시하며 이들 나토 국가와의 교섭 보류를 요청했다. 73년의 합의는 75년 8월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과 덩컨 방산·군수담당 국방차관이 직접 한국에 와서 군수산업 시찰을 하고 나서야 급진전하게 됐다.

이에 따라 영국의 105·155㎜ 포, 서독의 레오파드 전차 도입계획이 성료 직전에 중지됐다. 군함용 하푼미사일을 팔라는 한국측 요구에 지지부진하게 반응하던 미국은 한국이 프랑스에서 엑조세미사일을 도입하자 태도를 바꿔 조기판매를 확약했다.

유도탄 개발을 위해 미국의 로켓·인공위성 회사에서 기술을 도입하려던 계획은 미 국방당국의 견제로 실패했다. 결국 한국은 유도탄 추진제 제조에 필요한 기술은 어렵사리 프랑스에서 들여오고 유도탄 자체는 독자적으로 개발, 마침내 78년 한국형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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