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국희(박지미) 뿐이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거리로 나서고 위안부나 기생으로 일본인의 노리개가 돼야 했던, 가난한 소녀에게는 더욱 고달프고 서러웠던 지난 역사.MBC 월·화 특별기획드라마 「국희」(극본 정성희, 연출 이승렬·이주환)에는 「시대」가 있다. 딸의 출생과 자신의 죽음을 맞바꾼 어머니, 의사로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 영재(정동환), 그래서 혼자가 된 국희, 국희를 키워주는 아버지 친구 주태(박영규)에게 그 시대는 제각각의 무게와 색깔을 주었다. 어린 딸을 버려두고 만주로 떠난 영재에게 그 시대는 위기와 신념의 세월이었고, 국희에게는 외롭고 눈물나지만 희망을 꿈꾸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주태에게는 탐욕과 배신의 세월이었지만.
어느 것이 최선인가 굳이 따지지 않는다. 친구가 맡긴 재산이 탐나 우정을 저버리고 일본헌병대에 밀고하는 주태조차 미워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 뒤섞여 「국희」는 역사 속의 드라마가 된다.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눈물과 웃음이 된다. 주태의 아내(김형자)와 신영(김초연)과 국희의 모습이 「콩쥐팥쥐」를 연상시키지만, 선·악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드라마를 친근하게 만든다.
그래서 「국희」에는 감정이 흘러 넘친다. 아버지와 어린 딸의 만남과 이별의 아픔이, 얹혀사는 소녀의 서려움이, 아이들끼리의 시샘과 우정과 모험이,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욕심이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다. 국희와 신영의 에피소드가 잠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면,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어김없이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어디임을 깨우치고, 바라던 중학교에 못가고 기생집에 맡겨지는 국희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결코 서두르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연출은 아름다운 배경, 수다보다는 절제로 그 슬픔과 희망을 크게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항상 주제를 잊지 않는다. 드라마의 성격을 흐트리지 않는다. 영재는 혼자 남게 된 국희에게 인생의 목표를 정해주고, 국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위험하지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국희」가 가족드라마이자 시대극인 동시에 여성 기업인의 「성장드라마」로 제갈길을 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그 성장의 책임은 아이들의 연기에 달려있다. 「국희」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있다.
제 나이에, 그 시대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역들. 그들은 꾸미려 하지 않는다. 선입관도 없다. 몸을 아끼지 않고, 작품에 몰입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을 사로 잡을 뿐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아이들도 변하고 커나갈 것이다. 곧 (28일 방송부터) 김혜수와 정선경이 국희와 신영이 된다. 국희가 기생집에서 도망쳐 서울의 한 과자점에서 일을 시작하듯 드라마 「국희」도 전환점을 맞았다. 과연 두 성인 연기자가 아역들이 흘린 땀을 어떻게 지켜갈지. 드라마의 승패가 걸려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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