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바시를 아십니까.작열하는 적도의 태양. 벽도 없고 담도 없이, 야자수 잎으로 얽은 나즈막한 원두막 같은 초가에서 맨발로 살아가는 사람들.
군대도 없고 TV도 없지만, 마나에바(Mwanaeba)라는 전주민 회의기구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조화를 이뤄나가는 주민들. 『인간이 노예가 되는 노동과 현대적 생활의 중압감보다는 가족과 평화, 대화와 여유에 삶의 가치를 둔다』고 말하며 오신타이(Otintaai.일출)와 붕인타이(Bungintaai.일몰)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
낯선 외지인들을 만나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마우리(Mauri)!』라는 인삿말을 먼저 건네는 따뜻한 사람들. 하와이 소재 브리검 영 대학에 유학할 당시 몇몇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다는 타라와고교 생물교사 폴 허먼(34)씨는 취재진들을 만나 『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라는 한국어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작은 섬나라 사람들의 강단있는 삶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나라를 지나는 날짜변경선이다(지도 참조). 원래 날짜변경선은 180도 자오선과 거의 일치해 세계를 동서로 나눈다.
서쪽의 길버트 제도와 중부 피닉스 제도, 동쪽의 라인제도 등으로 크게 나뉘어지는 33개의 산호섬으로 구성된 키리바시는 적도와 날짜변경선이 수직으로 만나는 한가운데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나라가 사실상 4등분됐다.
적도와 날짜변경선이 겹치는 국가는 지구상에 이 곳밖에 없다. 날짜변경선이 나라를 동서로 나누는 통에 같은 나라인데도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의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난다. 95년 키리바시는 날짜변경선을 자국 영토에 맞게 동쪽으로 끌어당겨 날짜를 통일시켰다. 영국의 그리니치도 이를 인정했다. 이 때문에 세계지도를 보면 날짜변경선이 키리바시에서 흡사 망치머리 모양으로 튀어나와있다.
이 날짜변경선의 조정이 키리바시를 바로 뉴밀레니엄의 일출을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맞는 나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국토의 동단 밀레니엄 섬은 자오선 근처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피트 섬보다는 22분, 통가왕국보다는 80분 일찍 2000년 1월1일의 첫 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키리바시의 역사는 평화와 전쟁, 문명과 자연의 공존을 한몸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곳에 주민이 정착한 것은 서기 200~500년 경 마이크로네시안들이 남태평양에서 이주하면서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1606년 스페인탐험대에 의해 처음으로 존재가 알려졌고 19세기 중반까지 길버트제도(Gilberts Islands)가 발견됐다. 현재의 나라이름 키리바시는 바로 영어 Gilberts의 원주민 발음에서 비롯된 것. 수도가 있는 섬 타라와는 2차대전 당시 일본과 미국의 격전지였다. 50년대 크리스마스 섬은 미국의 핵실험기지였다.
일본은 최근 이 섬에 우주기지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79년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한국과는 80년 국교를 수립했다. 현재 키리바시 내 외국공관은 대사관으로는 중국대사관이 유일하다. 타라와 섬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다. 연간 200~300만 달러인 배타적경제수역 내 외국 참치잡이 어선들로부터 받는 입어료가 국가 재정의 절반을 차지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96년 기준 920달러.
그러나 뉴밀레니엄의 첫 해를 보는 영광을 안은 키리바시, 인류는 어쩌면 다음 천년 후인 3000년에는 이 나라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들의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의 온실효과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섬들이 조금씩 바다로 잠기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100년까지 해수면이 46㎝ 상승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고, 이렇게 되면 키리바시의 섬들은 완전히 태평양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된다. 인류사의 굴곡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키리바시=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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